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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간 일자리 전쟁, 누가 피해자인가[김덕호의 갈등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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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기자I 2025.12.15 05:15:00

당장 쉬운 정년연장만 논의, 청년·고령자 간 갈등 반복
불법콜센터로 밀려난 청년·생계유지도 막막한 고령자
개혁 어렵다고 미루면 안돼

[김덕호 성균관대 겸임교수·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상임위원]지금 한국 사회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세대 간 일자리 전쟁이다. 정년 연장 논의가 본격화하며 청년과 고령 세대의 갈등은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현실의 생존문제가 됐다. 얼핏 보면 세대 간 싸움 같지만 실제로는 같은 파이를 놓고 경쟁하도록 만든 노동시장 구조가 갈등의 본질이다. 정년 논쟁이 반복되는 이유도 노동시장 개혁을 뒤로 미루고 정치가 가장 쉬운 선택인 정년 연장에 의존해 왔기 때문이다.

정년 연장의 최대 수혜자는 누구인가. 최근 대중에 회자한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이 떠오른다. 안정된 정규직, 두툼한 연봉, 예측 가능한 노후까지 갖춘 그들에게 정년 연장은 곧 소득의 연장이다. 한국의 정년 논의가 대기업 정규직 중심에서 출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전체 일자리의 85%는 완전히 다른 현실이다. 영세중소기업, 특수고용직, 프리랜서, 자영업자들은 오늘 벌어 내일을 걱정해야 한다. 이들에게 정년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년을 아무리 늘려도 이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사회적 거리감과 박탈감만 커질 뿐이다.

청년층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청년고용률은 18개월째 하락하고 ‘쉬었음’ 청년은 73만 명을 넘었다. 지난 5년간 60세 이상 고령취업자가 455만 명에서 640만 명으로 늘었지만 20·30대는 924만 명에서 907만 명으로 줄었다. 정년 60세가 도입된 2016년 이후 기업의 신규 채용 여력이 줄었고 청년의 입직기회는 더 좁아졌다. 기회가 줄어든 청년에게 한국 노동시장은 두 번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 결과는 비극적이다. 일부 청년들은 보이스피싱 해외 콜센터, 도박 사이트 브로커, 불법 유통조직 같은 그림자 노동시장으로 밀려나고 있다. ‘김 부장’을 꿈꾸던 청년이 범죄조직의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현실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한국의 노동구조가 만든 사회적 추락이다. 정년 연장이 청년의 기회를 더 압축하는 구조라면 그 피해는 단순한 취업난을 넘어 삶 전체를 뒤흔드는 충격이 된다.

고령층 역시 여유롭지 않다. 고령자 취업률과 실질 퇴직연령 모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고 많은 이들이 70세 넘어서까지 일해야 생계를 유지한다. 지방 중소기업에서는 “고령 근로자가 없으면 공장이 멈춘다”는 말이 나온다. 일부 제조업 현장에서는 60대 인력이 절반을 넘는다. 결국 청년도 고령자도 모두 피해자이며 문제는 세대가 아니라 이들을 둘러싼 구조다.

정치권의 대응은 갈등을 더욱 키우고 있다. 오랜 정책연대를 이어온 여당과 한국노총은 ‘정년연장-고용안정 패키지’를 강하게 추진하고 있다. 양측의 이해가 맞물리며 입법 동력도 어느 때보다 높다. 반면 야당은 대안도, 옹호연합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채 정치적 수세에 몰려 있다. 이대로라면 여당 법안은 연내 입법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정치적 속도만 앞서고 사회적 논의와 제도설계는 한참 뒤쳐졌다.

문제는 구조다. 해고는 경직적, 임금은 연공급, 청년은 진입이 막힌 구조에서 정년만 일률적으로 올리는 것이 옳은가. 해외는 정년만 기계적으로 올리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미국·영국·독일·일본·싱가포르 모두 임금체계 개편, 직무전환, 고용유연성, 연금개혁을 결합한다. 특히 일본은 정년 60세를 유지하되 65세까지 계속고용을 의무화하고 임금과 직무를 재설계해 기업부담을 최소화한다.

정년 연장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목표는 ‘정년 65세’가 아니라 세대 간 일자리 균형과 지속 가능한 노동시장이어야 한다. 임금과 해고 체계가 합리화된다면 정년을 폐지하는 것이 오히려 더 공정하고 지속 가능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김 부장의 정년이 몇 년이냐’가 아니라 청년이 범죄 콜센터로 밀려나지 않고 고령자가 존엄을 지키며 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정년 연장은 쉽고 구조개혁은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선택하는 길이 다음 세대가 마주할 노동시장을 결정한다. 정치가 이제는 ‘쉬운 선택’이 아닌 ‘옳은 선택’을 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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