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지만 치열하다. 이곳 저곳에 배우들이 무리를 지어 저마다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동작을 시연해 보이며 장면을 더욱 세밀하게 파고드는 모습들. 아직 시작 전인가, 했던 <환도열차>의 연습은 예술의전당 연습실에서 이처럼 밀도 높게 진행 중이었다.
<여기가 집이다> <햇빛샤워> 등의 장우재가 쓰고 연출해 2014년 예술의전당 기획공연으로 초연된 극단 이와삼의 연극 <환도열차>가 2년 만에 재연을 앞두고 막바지 연습이 한창이다.
1953년 피난민을 싣고 부산에서 출발한 환도열차가 시간을 뛰어 넘어 2014년 서울에 도착했다는 남다른 상상에서 출발하는 이 작품은 환도열차의 유일한 생존자 지순을 통해 현재 우리의 현실을 비춰내는 작품이다. 박진감 넘치는 전개와 배우들의 열연 등이 어울린 탄탄한 작품성으로 초연 당시 동아연극상 희곡상, 공연과 이론 작품상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얼마만큼 각자의 장면 연습이 진행된 이후, 마이크를 들고 서두르지 않는 목소리로 장우재 연출은 몇몇 배우들을 불러 정리되지 않은 장면의 대사를 다시 한번 고치고 합을 맞춘다. 한 번 해 본 공연이니 재연 준비는 좀 더 쉬울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큰 오산인지는 공연 준비를 하는 당사자나, 그 현장을 잠시라도 목격한 이라면 쉬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이 낯선 두 시대를 충돌시켜서 거기서 어떤 느낌이 일어나나를 보고 있잖아요. 옛날 사람이 갑자기 현대를 탁 만나니까, 옛날 사람들이 중요시 했던 것과 현대인들이 중요시 했던 것들이 다르니까 거기서 혼돈을 겪는데, 초연 때는 그럼으로 인해서 지순(주인공)이 이에 환멸을 많이 느끼는 인상이 좀 있었죠. 일반 관객들이 보기에, 물론 환멸을 느낄 만 한 구석은 있지만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자고 얘기하는 게 말이 되냐, 다소 감상적이다, 라는 얘기가 있었어요." (장우재)
빠르고 결과 중심적인 현대화
그 안에 얻은 것은, 잃은 것은,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초연을 통해 얻은 다양한 관객들의 반응과 이를 계기로 이어지는 작품에 대한 또 다른 사유는 재연의 방향이 될 터이다. 장우재 연출은 이번 재연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과거나 현실, 둘 중 하나를 택하는 시선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들었다.
"다시 들여다보니, 현대의 성과중심주의 때문에 사실 현재 대한민국이 부를 이루게 된 거다. 그런 분명한 성과가 있었던 거다. 그렇다고 낡은 것은 버리고 새로운 것은 무조건 좋고, 서양의 것은 좋고, 우리 것은 좀 후지다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다. 낡았지만 소중한 것은 좀 보고, 그 안에 고유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있다, 부를 이루는 과정에 놓친 것들이나 일을 함에 있어서의 한계 등도 있을 거다, 라는 시선이 중요하다. 이번 재공연에는 한꺼번에 그걸 '환멸'이라는 감상으로 보지 않고, 이 과정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이고 놓친 것은 무엇인지 그걸 정확하게 보자는 것이다."
초연 당시 지순의 시선으로 극이 전개되었다면, 이번에는 지순의 태도와 한국에 환멸을 느끼고 미국으로 떠난 나사(NASA) 파격 조사관 제이슨 양의 시선, 두 개의 축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게 장 연출의 설명이다.
"이번 공연에서 제이승 양이라는 캐릭터의 변화가 크다. 초연 때는 의심이 많은 인물이었는데, 지금은 현상에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태도를 취하는 인물이다. 또 초연 극 후반부에 지순이 "과거로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이번엔 제이슨이 "가난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자는 얘기냐"고 반문하며 지순이 "과거, 미래, 그런 게 아니라 진짜 현실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를 한다. 지순이 겪은 이 황당한 일을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결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깨고 진짜 현실로 돌아가기를 지순은 원한다. 그건 특정한 시간대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하면서 뒷부분이 좀 축약되었고, 전체적으로 공연 러닝타임이 20분 정도 줄었다."
부산에서 남편을 찾아 서울로 온 1953년의 여인 이지순. 20대 초반의 그녀 앞에는 젊은 날의 모습과는 너무 달리 세속적인 인물로 변해버린 90살의 남편과, 물질을 위해 가족과 이웃의 구분도 없이 간악함을 일삼는 사람들이 서 있는 끔찍한 광경이 펼쳐진다. <환도열차>에는 사람도, 세상도 너무나 크게 변해버린 상황에서 점점 더 커져가는 지순의 혼란이 요동친다.
차가운 따뜻함 구현되었으면.
아직도 우리는 2014년 자장 안에 있지 않나
"배우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차가운 따뜻함을 가져봐라. 말로는 쉽지만 표현하긴 참 어려울텐데. 차갑게 '그건 옳지 않습니다'라고 해도 그 사람의 굉장히 뜨거운 진심에서 나오는 나오는 말이구나, 알게 되는 형국이 있지 않나. 그런 것들이 작품에서 좀 더 구현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그렇지 않나. 일면(一面)이 아닌."
무엇보다 열심히 후배들과 장면 연습에 몰두하는 윤상화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세부 동작에 대한 이야기, 그 한 동작이 나오게 되는 배경, 인물의 심경, 상대방의 반응 등을 다각도로 제시하며 장면을 만드는 그를 두고 장 연출은 "내 연극의 3, 4할은 저 친구 몫"이라 했다.
"굉장히 좋은 작업자다. 내 할 일만 하는 게 아니라, 통째로 이 연극을 만든다는 것 자체에 대해 같이 사유한다. 연극 배우는 확실히 그런 면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 아이디어 하나로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굉장히 좋은 작업자고, 모든 프로덕션에서 많이 원한다."
윤상화는 <환도열차>에서 지난 초연 때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변해버린 아흔 살 노인, 지순의 남편 '상해'로 분할 예정이다. 주인공 지순 역은 초연 때 열연한 김정민이 다시 맡았다. 이외 이주원, 김용준 등 20여 명의 배우들이 무대를 채울 <환도열차>. 재연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연출가의 마지막 말이 묵직하다.
"재연을 준비할 때 이 열차의 도착 연도를 2016년으로 해서 현재를 드러내야 하나, 아니면 아예 좀 더 과거로 가볼까, 여러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2014년으로 하자고 결정했다. 왜냐면 초연 때 큰 사건(세월호 사건 등)도 있었지만, 아직 그 자장 안에서 지금 현재 대한민국이 아직 안 벗어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2014년을 다시 한 번 짚는 것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장우재 연출이 당분간은 2014년을 짚고 있는 작품의 모습을 좀 두고 싶다는 <환도열차>는 오는 3월 22일부터 4월 17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글: 황선아 기자(매거진 플레이디비 suna1@interpark.com)
사진: 배경훈(Mr.Hodol@Mr-Hod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