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1979년 12.12 쿠테타와 관련해 1997년 대법원으로부터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숙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이라는 기다란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특전사령관 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 장성들은 광주 개입을 줄기차게 부정하고 있다. 40년이 지났지만 시민들에게 발포명령을 내린 군 수뇌부부터 광주에 파견돼 그 명령에 따라 민간인을 사살했던 공수부대원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제대로 책임을 진 사람은 없다.
뮤지컬 ‘광주’는 놀랍게도 피해자 뿐 아니라 ‘가해자’에도 초점을 맞춘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다. 당시 광주에서 유언비어를 선동하고 시민들 사이에 프락치로 침투해 민주화 시위를 북한의 사주로 몰아가는 특수부대 ‘편의대’를 픽션으로 설정하고 그 부대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당시 특수부대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가해자의 일원이다. 당시 광주를 겪은 시민들은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살육을 자행한 공수부대원의 얼굴에서 지옥을 보았고, 악마의 이미지로 남아있을 것이다.
|
아마도 많은 반대가 있었을 것이고, 반정부 불순분자라는 유언비어와 함께 모종의 덫에 걸려들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광주 시민군은 ‘레미제라블’의 앙졸라처럼 그렇게 훈련되고 조직된 전사가 되려는 혁명가들이 아니었다. 단지 살육과 공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다가오지 않게 하기 위해 먼저 행동한 시민들이었다.
이 작품에서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려고 시민들 사이로 침투한 편의대원 박한수가 광주의 참상을 가까이서 목격하고 난 후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시민들의 무장화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행동이 무대 위에서는 1980년 당시 무력충돌을 피하고자 하는 많은 선량한 시민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대표 캐릭터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극중 그 편의대원의 활약을 쉽게 지지하고 동화될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역사적인 현실이 너무 무겁다. 편의대원이 가상의 픽션적 캐릭터라고 해도 가해자쪽의 사람이기에 가해자들의 음모와 그들의 만행을 작품 속에서도 굳이 만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피해자들의 영혼, 남겨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듬어야 하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은 힘들기 때문에.
그래서 공연을 처음 보면서 왜 군인의 시각에서 광주를 바라보려고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관객으로서 조금씩 깨닫게 됐다. 피해자는 있고 가해자는 없는 상태로 이대로 세월을 흘려보내야 할까? 가해자 서사를 통해서도 광주의 실상과 당시의 정서를 새롭게 다층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을.
|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는 피해자로서 40년 동안 용서하고 포용해 왔다. 특정되지 않는 가해자까지도. 그래서 이 작품이 광주에서 공연된다면 자신들의 그간의 고통과 용서의 마음들이 모두 무대 위에 올라가 있을 것을 목격할 것이기에 너무도 애통할 것 같다. 한동안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로간에 충혈된 눈인사만 나눌 것 같다.
뮤지컬 ‘라이언 킹’을 만든 연출가 줄리 테이머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관객은 훨씬 현명하다”고 말했다. 공연을 만드는 사람이 관객보다 더 현명하기는 어렵다. 이 작품은 그 현명함을 넘어서서 자신의 영혼을 무대에서 발견할 수 밖에 없는 남도의 그 관객들을 위해 쓰여졌다. 서울에서 먼저 보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가. 배웅이라도 나서야할 것 같다.
이 작품은 최우정 작곡가 특유의 유럽 오페라 양식과 고선웅 연출가 특유의 연극적 요소가 만났다. 마치 거문고와 비파처럼 아름답게 어우러져 ‘금실지락’(琴瑟之樂, 부부간의 사랑) 같다. 낮고 무거운 내면 위에는 높고 날카로운 외양이 얹혀져 있다. 집단의 대립을 캐릭터 안무로 풀어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혁명 시대의 인물들의 신념을 다룬 ‘레미제라블’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시대와 계층이 엇갈리며 만들어내는 비극이 하나로 모아지며 불기둥을 만드는 면에서 바그너와 쿠르트 바일의 작품들이 무덤 속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토종 작품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벨칸토 창법 대신 동시대 어법을 택했다. 레시타치보 장면들과 ‘뮤지컬 같은’ 순수한 송을 구사하는 장면들 사이의 편차는 향후 좁혀질 것이라 믿는다. 1막과 2막의 각각 포커싱 지점과 밸런스도 조정 가능하겠지.
|
팔다리를 흔드는 방식, 달리고 멈추는 방향과 동선에 모두 디렉션이 들어가있다. 대극장을 여기서 저기까지 앙상블로 그냥 채우는 작품이 아니다. 신비하고 미묘하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뛰게 만들었을까? 나지막한 흥분. 차가운 외침. 한쪽 발을 땅에 대고도 말 안장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는 노련한 기수들 같다. 고선웅 연출가의 전작 뮤지컬 ‘아리랑’ 때 느꼈던 고선웅의 바이러스가 그들에게 침투라도 한 것일까?
물론 아쉬운 점도 여러 가지 있었다. 혁명 서사가 대부분 남성 중심이어서 여성은 ‘혁명의 치어리더’라는 비판을 많이 듣게 된다. 이 작품에서도 여성 캐릭터들의 역할의 한계가 보인다. 시민군의 리더이자 야학 선생이 설파하는 야학의 목적이 표면적으로 화이트칼라 혹은 신분 상승을 목적으로 하는 것 같아 아쉽다. 전태일 열사가 이미 노동자에게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설파하고 산화했기에 야학에서 그 가치를 보다 강조했다면 어땠을까 기대를 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관극이었다. 한국창작뮤지컬이 올해 거둔 여러 수확이 있지만 이 작품도 그 중 큰 도전과 결과를 낳은 문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이 작품으로 인해 벌어진 많은 논쟁과 비평을 통해 광주는 여전히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광주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얼까? 이제 세월이 지나면 광주를 관련 콘텐츠의 소비를 통해 알아가는 시대가 될 것이다. 광주 소재의 컨텐츠의 합집합이 광주는 아니지만 그 품은 넉넉하다. 40년전 광주시민은 순수했고 일상은 아름다웠기에 그들을 다룬 소재라면 그것 역시 ‘1980년 광주’가 될 것이다. 아마도 그 다양한 시도들과 그 다층적인 심연은 꾸준히 지켜보면서 조금씩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