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주하게 움직인 군·정보기관과 달리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스라엘 총리실은 네타냐후가 (공격 개시 1분 전인) 7일 새벽 6시 29분에야 상황을 보고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압바스 카멜 이집트 총정보국장이 전쟁 열흘 전 네타냐후에게 하마스의 이상조짐을 경고했다는 언론 보도엔 ‘가짜 뉴스’라고 펄쩍 뛰고 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관계자는 “네타냐후가 자신은 전쟁에 아무 책임이 없는 사람이라는 스토리를 만들려 하고 있다”고 현지 일간지 하욤에 비판했다.
|
◇팔 자치정부 견제하려 하마스 지원 ‘실책’
이번 전쟁 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정계에서 네타냐후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1996~1999년, 2009~2021년 두 차례 총리를 지낸 데 이어 지난해 말 총리직에 복귀했다. 이스라엘 건국 이래 최장수 총리다. 특히 안보는 네타냐후의 핵심 정책이었다. 지지자들은 네타냐후를 ‘미스터 안보’라고 치켜세웠다. 자신도 자서전에서 “군인으로서 나는 전쟁터에서 이스라엘을 방어하기 위해 싸웠다”고 자부했다.
1996년 처음 권력을 잡을 때부터 네타냐후는 안보를 공약 전면에 내세웠다. 라이벌이었던 시몬 페레스 당시 총리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오슬로 협정을 맺고 ‘2국가 해법’(1967년 이전 국경선을 근거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각 독립국가로 공존하자는 원칙)을 추진했다. 네타냐후는 오슬로 협정 이후에도 팔레스타인의 테러가 끊이지 않는다는 점을 들며 페레스를 공격했다. 이 강경론이 힘을 얻으면서 네타냐후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총리(당시 47세)가 될 수 있었다. 이때 역설적으로 네타냐후 집권을 도운 테러 주도 세력이 지금 네타냐후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하마스다.
집권 이후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 정책을 외교 전면에 내세웠다. 특히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유대인 정착촌을 공격적으로 지었다. 나아가 서안지구 일부를 이스라엘 영토로 합병할 수 있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주권을 무시하는 조치로 오슬로 협정을 사실상 형해화했다. 미국 중동이해연구소는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서 네타냐후가 2020년 아브라함협약을 통해 아랍에미리트(UAE)·바레인·모로코 등 아랍국가와 수교한 것도 팔레스타인을 고립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다고 꼬집었다. 네타냐후는 자서전에서 “도덕적인 국민이 된다고 점령과 학살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자신의 노선을 설명했다. 이 같은 정책 덕에 네타냐후는 초정통파 유대교 신자나 유대인 정착촌 주민들로부터 열성적인 지지를 받아 왔다.
네타냐후는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통치하는 파타(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여당)를 견제하기 위해 하마스와 손을 잡는 것도 마다치 않았다. 파타와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주도권을 두고 내전까지 벌였던 앙숙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일간지 하레츠에 따르면 2019년 네타냐후는 집권 리쿠드당 회의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저지하고 싶은 사람은 하마스를 강화하고 하마스에 돈을 대는 걸 지지해야 한다”며 “이건 가자지구 팔레스타인인을 서안지구 팔레스타인인으로부터 떼놓기 위한 전략의 일부”라고 말했다.
|
◇형은 전쟁영웅, 본인도 특수부대 출신
이 같은 네타냐후의 매파적 성향은 집안 내력이기도 하다. 네타냐후의 아버지 벤지온 네타냐후는 역사학자이자 강경한 시온주의(유대국가 건설운동) 활동가였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나치와 동일시하며 이들과 협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형 요나탄 네타냐후는 이스라엘에서 프랑스로 가던 도중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에 의해 우간다 엔테베공항으로 납치당한 에어프랑스 항공기 승객을 구하려다가 전사했다. 네타냐후는 자서전에서 “요니(요나탄)이 엔테베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마치 내 인생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네타냐후 자신도 젊은 시절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특수부대인 사이렛 매트칼에서 복무하며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검은9월단에 납치당한 사베나 항공기 구출 작전에 참여했다. 그는 1972년 군 복무를 마친 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 유학 갔으나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복귀해 싸웠다. 이 같은 ‘영웅 서사’는 네타냐후가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
◇안보 위기 부른 독선과 권력욕
이스라엘 내에선 네타냐후의 독선과 권력욕이 너무 커졌다고 우려하고 있다. 한때 리쿠드당에서 네타냐후와 함께 일했다가 지금은 야당 인사가 된 지브 엘킨은 “네타냐후의 이념이 ‘이스라엘에 최악의 상황은 내가 이스라엘을 이끄는 걸 그만두는 것이므로 내 생존이 모든 걸 정당화한다’는 세계관으로 변모했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올해 이스라엘을 혼란으로 몰아넣은 사법제도 개편이 그 예다. 네타냐후는 지난해 취임 후 사법부 권한을 약화하는 법안을 추진했는데 자신의 부패 혐의 재판을 무마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다. 이 법안에 야당은 물론 군과 정보기관까지 우려를 표명했다. 후에 결정을 철회하긴 했지만 사법제도 개편에 반기를 든 요아브 갈란트 국방장관까지 해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지 않아도 네타냐후가 군 수뇌부를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로 견제하던 상황에서 내부분열은 이스라엘군의 역량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지난해 재집권하는 과정에서 네타냐후가 극우파와 손잡은 것도 이번 전쟁 불씨가 됐다. 극우 정당 오츠마 예후디트를 이끄는 이타마르 벤-그비르 국가안보부 장관은 취임 후 군인과 유대인 정착촌 주민 등을 대동하고 이슬람 성지인 알아크사 모스크를 잇달아 찾아 무슬림을 자극했다. 이는 하마스가 전쟁을 일으키는 빌미가 됐다.
|
◇이스라엘의 처칠? 체임벌린? 네타냐후 미래는
네타냐후는 평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구해낸 윈스턴 처칠 전 총리를 동경해 왔다. 그는 19일 이스라엘을 찾은 리시 수낵 영국 총리에게 처칠의 말을 빌려 하마스 공격이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때(darkest hour)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반면 제니퍼 루빈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는 16일 칼럼에서 네타냐후를 독일에 대한 유화책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가져왔다는 비판을 받는 네빌 체임벌린 전 영국총리에 빗댔다.(최근 체임벌린은 나치에 맞서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는 재평가를 받고 있다.)
네타냐후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이번 주 이스라엘 일간지 마리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중 67%는 이번 전쟁이 제4차 중동전쟁보다 더 큰 위기라고 답했다. 응답자 94%는 정보전 실패에 대한 책임이 정부에 있다고 답했고, 전쟁이 끝나면 네타냐후가 사임해야 한다고 답한 응답자도 56%에 달했다.
네타냐후 평전을 쓴 마잘 무알렘 알모니터 정치평론가는 “네타냐후는 항상 이스라엘의 수호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며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 신화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