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희문을 나서자마자 나오는 신당동(新堂洞) 지명도 장례와 연관돼 있다. 신당 일대는 자연히 묘지가 조성됐고, 인근 금호동과 옥수동까지 묏자리가 이어져 일대는 거대한 공동묘지가 형성됐다. 망자 곁에는 혼을 달래는 무당이 붙기 마련이었다. 광희문 주변으로는 무당들이 몰렸고, 이들이 모시는 신이 자리한 ‘신당(神堂)’이 생겨났다. 그러면서 동네 이름이 신당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신당(神堂)은 갑오개혁(1894~95년)을 거치면서 지금의 신당(新堂)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이름만 바꾸었지 그 자리는 묘가 계속 들어섰다. 그러다 서울의 팽창과 함께 개발의 전기를 맞는다. 서울 인구가 증가하면서 주거 시설이 부족해진 게 동력이었다. 도시계획이 새로 짜이면서 신당에는 대규모 주택 단지가 들어서게 됐다.
사실 신당은 예로부터 주거 지역으로 선호하던 곳은 아니었다. 도성 밖이라 인프라가 취약했고, 결정적으로 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터에 신당은 움집과 토막집이 밀집한 조선 시대 대표적 빈민촌으로 꼽혔다. 그럼에도 지리적으로 신당은 시내와 접근성이 뛰어나 우선 개발 지역으로 꼽혔다. 왕십리·청량리 동북부권 개발의 중간 단계로서 신당은 짚고 넘어갈 지역이기도 했다. 이로써 신당리 묘지는 1929년 홍제동 묘지로 이전이 정해졌다.
개발은 일본 자본의 민간 주도로 이뤄졌다. 과정에서 이주 문제를 두고 갈등하다가 원주민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결국 성북동으로 이주하는 선에서 갈등이 봉합되고 묘지를 밀어냈다. 그 부지에는 일인과 조선 상류층이 거주하는 고급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신당동과 면해 있는 장충동은 당시 고급 주택 단지로 조성돼 현재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