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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의 큰절 문화는 유서가 깊다. 특히 노골적인 금권선거 관행이 일소된 90년대 이후에는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에게 지지나 표를 호소하는 방편으로 큰절을 활용하는 것이 하나의 이벤트로 자리 잡았다. 선거철에는 큰절을 하던 정치인들이 당선 후에는 유권자들을 나몰라라 하는 모습을 희화화한 우스개가 있을 정도다. 당장 구글,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에 큰절을 검색어로 입력하면 가장 먼저 뜨는 사진도 다름 아닌 정치인들의 큰절 사진이다.
정치인들이 큰절을 사랑하는 이유를 유추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유교적 예의 규범이 지배하는 동아시아 사회에서 큰절은 여전히 가장 예의를 다한 인사법의 하나로 통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치 무대에서의 큰절은 전근대사회에서 바닥에 엎드리는 행위가 가지는 주종관계의 은유도 더해진다. 큰절만큼 ‘당신의 종으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는 행동을 찾기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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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다리를 천으로 동여맨 모습을 보여준 데도 ‘큰절’ 사연이 얽혀 있다. 추 장관은 2004년 있었던 17대 총선 당시 그 전해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찬성한 것을 사죄하는 의미로 광주에서 사흘이나 삼보일배를 한 적이 있다. 추 장관은 당시 후유증으로 자리에 오래 앉아 있기 힘들어 다리를 묶는 버릇을 들이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추 장관은 삼보일배에도 17대 총선에서는 낙선해 4년 뒤에야 국회에 다시 입성할 수 있었다.
수인이 된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정치적 목적으로 장시간 큰절을 올린 일이 있다. 박 전 대통령도 17대 총선을 앞둔 2004년 3월 서울 조계사를 찾아 108배를 올렸다. 한나라당 대표로 취임한 박 전 대통령은 당이 불법선거자금 등으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자 108배 등 각종 정치이벤트를 벌이며 지지율 회복을 노렸다. 박 전 대통령의 108배는 추 장관과는 달리 그런대로 효과가 있었는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21석이나 얻으며 선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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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정치인들의 큰절은 실제 효과를 떠나 대개는 그들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이 보여주는 수준 이하 행태 때문에 투표를 앞두고 벌이는 큰절 공세가 ‘그저 그때 뿐인 쇼’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당장 20대 총선 당시에도 알만한 정치인들은 모두 큰절을 올렸지만, 그들의 ‘성심’이 이번 국회를 역대 최악의 국회로 전락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19대 국회는 여러모로 말이 많은 국회였다. 4년 내내 시끄러웠던 국회지만 3월까지 법안 처리율은 32%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국회의원들은 개개가 하나의 ‘입법기관’임에도, 20대 국회는 본업인 입법에 너무나도 인색했던 셈이다. 선거법 개정과 공수처 설치를 두고 벌어진 대립은 미래통합당 해산을 요구하는 ‘100만 청원’을 부르기도 했다.
선거 역시 하나의 홍보 과정임을 감안하면 큰절까지 동원하는 후보자들의 지지 호소 공세를 무작정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이같은 관행이 도리어 한국 의회 정치의 미성숙을 반영하기에 시민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유권자들이 내일 치러지는 선거만큼이나, 선거 이후에 벌써부터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