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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위주 건설로는 성장 한계…밥그릇 싸움에 뒤쳐지는 경쟁력

하지나 기자I 2021.01.12 05:30:00

해외시장 설계·조달·시공 일괄 수주 증가…설계 역량 중요성 커져
건축업계 반발 "대형건설사 설계시장 독점…설계 독창성 훼손 우려"
건설사 설계 겸업 역차별 논란도…건축사무소, 건설업 진출 가능
BIM 등 스마트 건설기술 도입 확대…시공·설계 경계 불합리

[이데일리 하지나 기자] “설계와 시공 일괄 수주는 글로벌 건설 수주환경에선 일반화돼 있다. 하지만 국내는 여전히 설계과 시공 겸업금지라는 낡은 규제에 묶여 해외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대형건설사 해외영업 담당임원)

“대형건설사의 설계시장 잠식과 시공사의 이윤추구로 오히려 설계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국내 건설사의 국제경쟁력이 설계 때문에 떨어진다는 건 핑계다.”(건축사사무소 대표)

◇PM·CM 시장 확대…설계역량 중요성 커져

건축법상 설계와 시공 겸업금지를 둘러싼 논란이 1994년 ‘겸업허용 공식 요구’가 처음 나온 이후 3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현행법상 국내 건설사의 설계 겸업이 명시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다. 다만 건축사법 제23조에 따르면 건축사가 건축사업을 하려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국토교통부 장관에게 건축사사무소의 개설신고를 해야 한다. 상호에는 건축사사무소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또 건축사법 시행령 23조에는 법인이 건축사사무소 개설 신고를 하려는 경우 그 대표자가 건축사여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건설사 입장에선 겸업을 할 수 없도록 한 그림자 규제인 셈이다.

(그래픽= 김정훈 기자)
건설업체들은 꾸준히 설계 겸업 허용을 요구해 왔다. 가장 큰 이유는 설계·시공의 분리로 시공과정에서 개발된 기술이나 공법이 설계 과정에 반영하지 못하면서 설계 기술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대형 건설사의 경우 회사 내부에 설계사를 두고 있지만 대부분 다른 설계회사에서 가져온 설계도면을 검수하거나 지원하는 수준에 그친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설계상 문제점이 발생하면 시공사에서 도면을 검토하고 변경한 후 또다시 설계사에게 의뢰해야 하는 등 번거로움이 크다”면서 업무 분화에 따른 불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실제로 대형건설사의 설계 역량은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미 해외시장에서는 설계·조달·시공을 동시에 수행하는 EPC 방식 해외발주가 늘어나는 추세다. EPC를 총괄하는 CM(설계·조달·시공) 및 PM(계획·설계·구매조달·시공 및 감리·운영관리)의 글로벌시장은 244억 달러로 전체 건설엔지니어링 매출(967억달러)의 25%를 기록하는 등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건설사의 설계 겸업 제한이 형평성에도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현재 설계업체의 건설업 진출에 대해서는 특별한 제약이 없기 때문이다. 건설업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자본금과 건설기술인, 사무실만 갖추면 된다. 예를 들어 건축공사업을 등록하려면 자본금 3억5000만원 이상, 건설기술인 5인 이상, 전용 사무실이 필요하다.

토목건축업도 비교적 경계가 느슨하다. 건설산업기본법 제26조 2항에 따르면 대규모 복합공사로서 공항·고속철도·발전소·댐 또는 플랜트공사의 건설사업관리업무를 위탁받는 자가 건축사·기술사 등 관계법령에 의한 설계 또는 감리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기술인력을 갖춘 경우에는 ‘건축사법’ 제23조 1항 또는 ‘건설기술관리법’ 제28조 1항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설계 또는 감리업무를 함께 위탁받아 수행이 가능토록 하고 있다.

최근 스마트 건설 기술이 확대되면서 설계업의 근본적인 역할에 대한 재정립도 요구되고 있다. BIM(빌딩정보모델링)과 모듈러 건축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BIM은 3차원 영상뿐만 아니라 각종 정보들을 포함하고 있어 설계, 시공, 유지관리 단계까지 활용 가능해 새로운 건설 패러다임을 가져왔다.

대한건설협회 관계자는 “건설사들이 BIM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활용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정작 건설분야의 업무 방식이 BIM 활용을 제한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AI기반 공동주택 3D 자동설계 시스템을 활용한 배치 조감도 예시
◇스마트건설 기술 도입…설계업 재정립 필요성도

반대로 건축 설계 업체들은 강하게 반발한다. 건축설계회사 한 관계자는 “대형건설사들이 시공 용이성, 이윤 추구를 통해 시장을 독점하려 드는 것”이라며 “이 경우 설계의 독창성과 창의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주장한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효율이나 규모를 중시하는 산업적인 측면이 강조되면 건축문화가 소외되고 디자인의 고부가가치 경쟁력 역시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건축사가 설계와 감리를 겸업하는데 건설사가 설계까지 맡게 되면 상호견제·감시하는 기능을 상실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논쟁은 자칫 두 업계의 밥그릇 싸움으로 내비칠 소지가 있어 대안적 방안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건축학과 한 교수는 “중소 설계 업체들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사비 규모 등에 따라 제한을 두는 등 단계적으로 규제를 개선하는 방안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향후 발생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보완책을 마련하는 식으로 접근해야지 무조건적인 반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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