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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다들 아시다시피 암호화폐로 해석되는 ‘cryptocurrency’는 암호화를 뜻하는 crypto라는 단어와 화폐를 뜻하는 currency가 합쳐 만들어진 신조어입니다. 이름 자체에 ‘화폐’라는 표현이 포함돼 있다보니 이것이 화폐냐 아니냐를 두고 한동안 논란이 뜨거웠었습니다. 위키백과를 봐도 암호화폐를 ‘암호화방식으로 거래 안전을 확보하고 추가적인 단위 생성을 통제하며 자산 이전을 인증하기 위한 교환수단으로 고안된 디지털 자산’이라고 정의돼 있습니다. 이 정의대로라면 화폐 기능을 일정 부분 가지는 디지털상의 자산 정도라 하겠습니다.
국내에서도 리메이크돼 널리 알려진 미국 드라마 ‘굿와이프(The good wife)’를 보면 시즌3, 제13화에서 비트코인을 주제로 다룬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비트코인이 화폐냐 아니냐를 두고 법정 공방이 이뤄지는데요. 주인공인 변호사 얼리샤 플로릭은 비트코인을 발명했다는 익명의 의뢰인을 변호하게 됩니다. 극중 등장하지 않지만 아마도 사토시 나카모토를 지칭하는 듯한 이 의뢰인은 개인이 새로운 통화를 만들 수 없다는 연방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미 재무부에 의해 기소됩니다. 이제 드라마에서 플로릭과 미 재무부측 변호사인 힉스가 벌이는 법정 공방을 몇 장면 옮겨와 보겠습니다.
힉스 변호사는 2011년 11월18일 크레스트뷰 호텔에 묵었던 탬보어라는 투숙객을 증인으로 요청합니다. 힉스 변호사가 “숙박비를 어떻게 결제하셨나요”라고 묻자 탬보어는 “비트코인”이라고 답한 뒤 당시 환율이 대략 1비트코인에 25달러여서 4.32비트코인을 냈다고 답합니다. 그리곤 비트코인으로 객실에서 영화를 보고 초코바와 땅콩도 먹었다고 진술하죠. 그러자 힉스 변호사는 “그걸(비트코인) 통화로 쓰셨죠”라고 되물었고 탬보어는 그렇다고 시인합니다.
이번에는 얼리샤가 크라코프스키라는 크레스트뷰 호텔 지배인을 증인으로 내세웁니다. 크라코프스키는 홍보를 위해 비트코인과 마일리지로 객실을 빌려주는 이벤트를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얼리샤는 “(비트코인 말고도) 마일리지로도 객실을 빌릴 수 있죠”라고 물었고 지배인이 그렇다고 합니다. 비트코인을 마일리지와 동일시 해 화폐가 아니라는 걸 부각시킬 셈이죠. 얼리샤는 “마일리지는 현금으로 취급 안 하시죠”라고 묻습니다. 크라코프스키 지배인이 “네, 비트코인이나 마일리지를 보관하는 서랍은 없어요”라고 하자 “(비트코인으로 객실을 빌려주는 건) 물물교환에 가깝죠? 마일리지를 객실과 교환하는”이라고 묻고 지배인도 그렇다고 합니다. 그러자 얼리샤는 “다른 말로 하면 통화가 아니라 상품이라는 거죠”라고 재차 확인하고 지배인은 그렇다고 답합니다. 이 지배인은 덧붙여 “이제 비트코인은 그만 하려고요. 처음엔 좋아 보였는데 좀 복잡해서요”라고도 합니다.
이제 힉스 변호사가 크라코프스키 지배인에게 반론합니다. “아마존에서 책을 구입한다면 호텔에서 받은 마일리지를 사용하실 겁니까”라고. 지배인은 “아뇨, 안할 것 같네요”라고 하고 힉스는 “교환되지 않기 때문이죠”라고 되묻습니다. 이어 “하지만 비트코인으로는 책을 살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묻고 지배인이 그렇다고 하자 “비트코인은 교환 가능하니 통화죠”라고 확인하듯 추가로 묻습니다.
이 모든 증인 진술을 듣고 있던 드와이트 소벨 판사는 더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양측 질문을 막고는 “바로 결론 내겠습니다. 비트코인은 통화입니다”라고 말하고선 의사봉을 세 차례 두드리며 판사석을 뜹니다.
참 명쾌합니다. 이 드라마 원작을 맡은 로버트 킹, 미셸 킹 부부가 비트코인을 신봉하는지, 또 투자했는지 알 순 없지만 어쨌건 킹 부부는 비트코인이 화폐라는 쪽에 손을 들어줍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드라마고, 특히 극중 상황은 재판이다보니 유죄와 무죄를 가려야 하고 이렇듯 흑과 백을 나눌 수 밖에 없었을 테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고 단순하지 않습니다.
화폐금융론에서 화폐는 교환 및 가치저장의 수단이자 가치척도의 기준으로 정의됩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보면 이는 화폐의 기능일뿐 정의 그 자체는 아닙니다. 두루뭉술하긴 해도 ‘교환과 가치저장, 가치척도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모두가 신뢰하는 그 무엇’이라는 편이 오히려 화폐의 정의에 더 가깝습니다. 모두가 신뢰하는 그 무엇은 법정화폐일 수도 있고 금(金)일수도 있고 비트코인일 수도 있습니다. 더 세분화하자면 금이나 가축, 쌀 등과 같이 그 자체가 실물로 가치를 가지는 실물화폐가 아니라 은행권이나 지폐처럼 표시된 화폐 단위로만 통용되는 명목화폐(fiat currency) 또는 불환지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게 바로 암호화폐일 수 있습니다.
물론 현 단계에서 비트코인을 비롯한 암호화폐를 화폐로 단정짓기는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신뢰받는 그 무엇인가는 화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지만 실제 그것이 화폐로 쓰이려면 그것의 가격이 안정적이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가격이 불안정하게 움직이는 비트코인을 누구나 거래에서 받아줄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겠죠. 또한 거래가 늘어나면서 거래 처리속도가 느려지고 있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죠. 특히 우리나라에서 화폐 발행권은 한국은행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의 법정화폐는 이런 한국은행권뿐이구요, 설령 의미를 확대해도 선불카드와 같은 지급수단이나 전자화폐 등이 있지만 이 역시 ‘재산적 가치가 입력’되는 방식이어야 하는데 디지털 신호에 불과한 암호화폐는 그렇지 못합니다. 결국 현행법상 암호화폐는 결코 화폐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건데요.
향후 암호화폐 가격이 안정되고 기술 발달로 거래 처리속도를 획기적으로 단축시킨다면 암호화폐는 교환이나 가치저장, 가치척도 중 어느 하나의 기능에만 충실한 형태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법정화폐를 대체하진 못하더라도 화폐로서의 일부 기능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겁니다. 당장 암호화폐를 화폐로 인정하지 못하더라도 자산으로서의 기능은 가지고 있는 만큼 암호화폐에 관한 법을 제정해 그 지위를 명확히 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구요, 그래야 암호화폐를 둘러싼 혼란이 명쾌해질 수 있습니다. 다만 좀더 길게 봤을 때 암호화폐가 화폐의 일부 기능을 담당할 수 있게 된다면 화폐의 화폐성을 판단하는 기준 자체를 확대하는 시도도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