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담장에 새겨진 '그때 그시절'…눈 감으면 보이네

강경록 기자I 2020.12.04 06:00:00

시간 멈춘 마을, 충남 서천 판교마을
1930년대 판교역 들어서면서 발전해
우시장, 모시시장 등 사람들로 북적여
마을 전체 건축 제한 걸려 개발 멈춰
젊은이들은 하나둘 도시로 떠나

충남 서천 판교마을 동일주조장 앞으로 할머니들이 보행보조기에 의지해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다.


[서천(충남)=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눈을 감으면 조그만 시골 마을/옛 풍경이 보이네//복작복작거리던 시장/졸졸졸졸 흐르던 하천/왁자지껄 낚시하던 남정네들/시끌벅적 모시 짜던 아낙네들//조그만 시골 마을의 정겨운 풍경이 보인다.”

충남 서천의 판교마을 담장에 새겨진 시 구절이다. 판교중학교에 다니던 임예지 양이 정겹게 묘사한 고향 풍경이다. 시 구절 속 마을은 바쁘고 고된 일상 속에서도 항상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제법 영화를 누렸을 이 마을도, 사람도 나이를 먹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던 간판 속 글씨는 희미해졌고, 거센 비바람과 추위를 막아주던 지붕과 담벼락은 낡아서 무너져가고 있다. 스산함만 남은 거리, 할머니 두명이 힘겹게 걸어가고 있다. 보행보조기에 의지한 채 한걸음, 한걸음이 느리고 또 느리다. 속절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이 마을의 시간도 할머니 걸음처럼 그렇게 느리게 흘러가고 있다.

판교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판교역 앞의 소나무. 1930년대 당시 이 소나무 주변으로 먹거리 좌판부터 광대,약장수까지 몰려 시끌버적했다.


◇쌀 싣고 떠나던 기차, 영화 보러 오던 관객도 멈춰선 마을

세월의 무게에 바래져 희미해진 판교마을 농협창고
찬 공기가 너울대는 초겨울의 판교마을은 스산함이 가득하다. 판교라는 지명은 나무판자로 다리를 놓았다 해서 ‘널다리’라 부르던 데서 유래했다. 판교가 가장 빛났던 시기는 1930년대. 당시 장한선 판교역이 들어서면서 쑥쑥 커나갔다. 충남에서도 알아주던 우시장과 모시시장도 번성했다. 마을 인구도 8000명이 넘었을 정도. 영원할 것만 같은 판교의 영화는 1980년대 들어 사그라졌다. 마을 전체가 철도시설공단 부지로 묶이면서 건축 제한에 걸려 개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판교의 시간은 그렇게 멈췄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우시장과 모시시장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꿈을 좇던 젊은이들도 하나둘 도시로 떠나기 시작했다.

판교 시간여행 들머리는 판교역. 지금은 장항선 직선화로 2000년대 들면서 더는 열차가 서지 않는다. 버려졌던 역사 건물은 판교특화음식촌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그래도 사람들로 북적이던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커다란 소나무는 그대로 역 앞에 여전히 서 있다. 1930년대부터 이 소나무는 기차를 기다리던 사람에게 그늘을 내어 주었다. 당시 소나무 주변으로 먹거리 좌판부터 광대, 약장수까지 몰려 시끌벅적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탈과 징용의 아픈 역사를, 해방 후에는 산업화로 도시를 떠나는 이들의 발걸음도 묵묵히 지켜봤다.

판교의 역사를 지켜보았을 소나무를 뒤로하고 길을 나선다. 역을 마주 한 체 800m 가량 걸어나가면 고석주 선생 기념공원이다. 이 공원 뒤 샛길로 들어서면 옛 농협 창고가 나타난다.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창고에도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다. 벽 한편 새겨진 ‘반공’, ‘방첩’이라는 글씨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희미하게나마 이 창고가 버텨낸 역사가 그려진다.

일제강점기 시절 충남 서천 판교마을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공관 및 영화관.


농협창고를 지나 판교철공소 맞은편으로 향한다. 이곳에는 ‘공관’이라고 불린 건물이 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세워진 건물. 당시에는 새마을운동 홍보와 반공교육을 했던 장소다. 때로는 이 건물을 극장으로도 운영했다. 판교 인근의 미산, 옥산, 문산, 비인, 서면 등에서 영화를 보러 몰려들었을 정도였다. 관객들은 영화 한 장면에 웃고 울 생각을 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극장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또 당시 유명 가수의 공연과 콩쿠르도 이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핫플레이스’였던 셈이다.

지금은 이 낡은 건물이 사람들로 북적였던 극장이었음을 추측하기 들 정도. 대신 극장 앞 매표소에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미워도 다시 한번’ 같은 1960~70년대 흥행작 포스터가 걸려 있다. 매표소 창구에 새겨진 영화 관람료는 일반 500원, 청소년 200원. 지금의 1/20 가격이다. 건물은 1990년대에 호신술 도장으로 또 한 번 모습을 달리했다. 입구 유리창에는 ‘호신술’, ‘쌍절봉’, ‘차력’ 등의 글씨가 남아있다.

서천 판교마을 농협하나로마트 후문쪽 골목벽에 그린 우시장
◇‘사람 반, 소 반’이던 시절, 담장에 새겨 추억하다

공관에서 나와 도로를 건너면 농협하나로마트다. 마트에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과거 판교우시장이 있었던 자리다. 판교우시장은 1980년대 중반까지 충남 3대 우시장으로 불릴 정도로 큰 시장이었다. 우시장이 열릴 때면 1000여 마리의 소가 이곳에 묶여 있었고, 하루 수백마리의 소를 거래했을 정도로 규모가 대단했다. 시장 주변으로는 수십 군데의 주막을 겸한 국밥집이 있어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회한과 기쁨이 함께한 시골 마을의 사연이 오롯이 담긴 정겨운 곳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개도 돈을 물고 다니던 시절’, ‘사람 반, 소 반’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시끌벅적한 우시장은 없어졌지만, 담벼락에는 당시의 모습을 그려놓고 옛 시절을 추억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지은 적산가옥인 장미사진관. 문 입구에 쌀과 잡곡 일절이라는 글씨가 눈에 보인다


담장을 따라 북서쪽으로 가면 장미사진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는 독특한 건물이 나온다.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을 인 적산가옥으로,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 가옥은 일제강점기 일본 부호가 살았던 집. 이 집에 살았던 일본인은 판교 주민을 쥐락펴락하며 만행을 일삼았다. 일본어로 “천황폐하 만세”나 “쌀 주세요”를 외쳐야만 쌀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 동행한 해설사의 설명이다. 광복 후에는 숙소(여각)로 사용했다. 당시 우시장이나 세모시장이 열리면 장사꾼들이 이곳에 옹기종기 모여 잠을 청했다. 그 뒤로는 반쪽을 쌀가게로, 다른 반쪽은 사진관으로 운영했다. 간판이나 창문에는 ‘쌀, 잡곡일절’, ‘사진관’이라는 글씨가 또렷하게 남아있다.

지금은 문을 굳게 닫아놓은 동일주조장


판교마을 여정의 종착지는 마을 북쪽의 주조장이다. 통닭집에서 위로 스무 걸음 남짓만 오르면 된다. 회백색 시멘트 건물은 세월의 때가 검게 묻었다. ‘동일주조장’. 서체는 모범생 아이가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듯 점잖다. 바로 아래에 건물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 ‘TEL 45.’ 수화기를 들고 통화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대면 전화교환원이 전화를 연결해 주던 시절, 동일주조장의 전화번호로 보인다. 자료에 따르면 주조장의 설립연도는 1974년 이전이다.

술이 있는 곳에 삶의 고단함이 흐르는 법. 3대째 이어진 주조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술을 공급하며 녹록지 않은 생활을 달래줬다. 1970년대, 쌀이 귀해 가정에서 술을 담그지 못하도록 엄하게 단속할 때도 주조장은 밀가루로 막걸리를 빚었다. 덕분에 주민들은 술 마시는 낙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열린 창 사이로 주조장 안이 보인다. 주조장의 시간은 20여 년 전에 멈춰 있다. 벽에 걸린 달력은 2000년 12월. 주조장의 역사도 그때부터 멈췄다.

판교중학교 앞 벽화 포토존과 학생이 쓴 시


◇여행메모

△여행팁= 스탬프 투어는 판교마을 레트로 여행을 더 오래 기억하는 방법이다. 판교역 또는 판교면행정복지센터에서 스탬프 투어 지도를 받은 뒤, 지도에 있는 6개 스폿에서 스탬프를 찍는다. 지도를 들고 돌아가면 마을 건물이 새겨진 그림엽서를 기념품으로 받을 수 있다.

△먹거리= 판교마을에서는 삼성식당과 수정식당이 유명하다. 이름도 정겨운 이 두 집은 10여 m 거리를 두고 사이좋게 서 있다. 한산 소곡주 얘기를 빼놓을 수 없는 일. 첫 잔을 마시면 그 향기로운 맛에 반해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고, 두 번째 잔을 마시면 어느새 손끝, 발끝이 취해 몸을 일으킬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앉은뱅이술’이라 불렀다. 서천으로 떠난 길에 동행과 함께 소곡주 한 잔을 곁들인다면 여행의 풍취가 한결 더해질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지주들이 살았던 적산가옥이 있는 거리는 인적이 없어 스산한 느낌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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