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위원 리뷰
25주년, 12번째 시즌 뮤지컬 `베르테르`
시적 대사와 서정 넘버, 회화적 무대의 조화
`무모한 열망`이 25년 간 롱런한 비결
마지막 꽃 쓰러지며 베르테르 삶 마감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엔딩으로 꼽혀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 사랑도 연애도 물질로 환원하는 시대다. 결혼소개소와 데이트앱의 보편화는 조건에 맞춰 상대를 구하는 세상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첫사랑의 순수함과 열정, 인간에 대한 예의를 서정적으로 담아낸 창작 뮤지컬 ‘베르테르’(고선웅 작·작사, 정민선 작곡, 조광화 연출, 구소영 협력연출·음악감독, 고 심상태 예술감독, CJ E&M·극단 갖가지 제작)가 25주년, 12번째 시즌에 이른 것은 기현상이다.
 | 뮤지컬 ‘베르테르’의 25주년 공연 배우 김민석과 류인아 모습(사진=CJ EN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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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문호 볼프강 폰 괴테가 1774년 발표한 서간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원작인 ‘베르테르’는 거대한 천둥소리와 현악기들의 애잔한 첫마디로 시작한다. 무대 막이 일부 열리고 명징한 피아노 연주에 맞춰 모던한 아이보리 톤 정장에 해바라기 꽃을 든 앙상블이 줄을 잇는다. 반대편 이젤에 꽃을 놓으며 안타까워하는 모양새가 추도식 같다. 관객들은 직관적으로 베르테르의 죽음을 상상한다.
극중 배경인 발하임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정원에서 해맑은 롯데(전미도·이지혜·류인아 분)가 속절없는 이끌림의 비극을 담은 인형극 ‘자석산의 전설’을 공연 중이다. 베르테르(엄기준·양요섭·김민석 분)는 자석처럼 롯데에게 끌려 들어가고 첫사랑의 부푼 가슴을 ‘어쩌나 이 마음’에 담는다. ‘베르테르’ 넘버 중 가장 환희에 찬 곡이다. 롯데에게 약혼자 알베르트(박재윤·임정모 분)가 있는 것을 알게 된 후 나락에 떨어진 베르테르의 ‘발길을 뗄 수 없으면’은 ‘어쩌나 이 마음’의 변주에 같은 운율의 다른 대사로 감정과 상황의 대비를 드러냈다. 2막 베르테르가 자살하기 직전 리프라이즈(같은 곡을 다른 분위기로 표현하는 것)되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이별의 슬픔, 내세로 향한 기다림까지 녹여낸 대표 넘버이다.
 | 이주영 문화칼럼니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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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무와 액션, 미디어아트가 대세인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예술작품 같은 ‘베르테르’가 25년간 롱런한 비결은 ‘무모한 열망’이다. 창작진과 관객의 ‘열망’이 재정 악화였던 2003년 공연을 살려냈다. ‘베사모’(베르테르를 사랑하는 모임)가 십시일반 제작비를 모아 이룬 기적이다. 2000년 초연 당시 뮤지컬 최초 회전문 관객을 양산한 작품이기도 하다. 창작진은 매 시즌 관객 반응을 연구하며 시대 흐름에 걸맞는 연출의 변화와 캐스팅으로 화답했다.
25주년인 올해 상연 중(디큐브링크아트센터, 1월 17일~3월16일)인 프로덕션 디자인은 2013년부터 바뀐 것으로 오케스트라 역시 피아노 1대와 현악기 10대로 확장했다. 무대예술도 붉은 장미와 원목 이미지에서 한없는 기다림을 의미하는 해바라기꽃밭과 모던하고 밝은 회화적 이미지로 바뀌었다. 베르테르가 자살에 이르면서 해바라기꽃밭의 꽃대가 모두 쓰러지고 롯데가 눈길을 준 마지막 한송이마저 쓰러지는 순간, 베르테르가 온전히 삶을 마감하는 상징적 대비는 가장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엔딩으로 꼽힌다.
여기에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크롭슈토크의 시구를 제련해 1막 만남과 2막 헤어짐의 키워드로 수미상관하여 운명적인 만남이었음을 살포시 드러냈다. 이들의 사랑과 이별에 공명하는 발하임 마을 사람들에게도 캐릭터를 부여해 한층 풍성해졌다. 마을의 대모격인 오르카(류수화·이영미 분)가 앙상블과 부르는 ‘왕년의 사랑’에서 “추억을 까먹으면서 사는 게 인생”이란 대목은 관객 대다수의 무미건조한 삶을 돌아보게 한다. 적어도 작품을 보는 동안에는 ‘무모한 열망’을 추억해보는, ‘순수로의 회기’가 가능하다.
 | 뮤지컬 ‘베르테르’ 25주년 공연 한 장면. 배우 양요섭과 전미도(사진=CJ EN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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