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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株소설]②인플레, 엔데믹 오면 '공급 병목' 잡히고 끝?

고준혁 기자I 2022.01.30 11:00:01

오렌지 주스 선물 가격 한 달 만에 30% 상승
감귤녹화병에 수확량 2차 대전 이후 최저
2001년 이후 오렌지 농장 규모 절반 축소도 이유
"10년간 구경제 투자 축소, 가격 상승 부메랑 됐다"
캐펙스 증가 길목 기업, 반도체·에너지·씨클리컬

[이데일리 고준혁 기자] 올해도 반도체 업계의 화두는 역시 쇼티지(shortage·부족)입니다. 여전히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와 “그게 아니라 공급(주로 로직 반도체)이 모자라기 때문이다”란 주장이 맞서고 있습니다. 세계 최대 반도체 공급사이자 코스피 대표주인 삼성전자(005930)의 이익 전망이 걸린 문제이기도 합니다. 수요가 많은 상황이어야 유리합니다.

왜 명쾌하게 결론 나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처음엔 구분이 쉬웠습니다. 작년 초부터 사람들이 백신을 맞으면서 경기가 돌기 시작, 급증한 주문량 탓에 물건 배송이 늦춰졌습니다. 명백한 수요의 영향입니다. 그러다 작년 여름 델타가 터져 동남아 공장이 멈춰 섰고, 몇 가지 부품이 없어 제품을 완성시키지 못하게 됐습니다. 공급의 영향입니다.

마치 도로가 막힌 게 원래 차가 많아서인지 길 한복판에 차 사고가 나서인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격입니다. 막힌 기간이 오래될수록 구별해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 몇몇은 “왜 이 길만 막힐까”란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애초 도로 자체가 넓었다면 병목 현상은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출처=옥션)
◇ 오렌지 농장을 덮친 감귤녹화병, 전 세계를 덮친 오미크론

17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미국 농무부는 올해 미국 플로리다주의 오렌지 생산량을 4450만 박스(90파운드 기준)로 예상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이후 가장 적은 규모라고 합니다. 원인은 감귤녹화병이란 치료할 수 없는 전염병이 오렌지 농장을 휩쓸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렌지 주스 선물 근월물 차트. (출처=바차트)
오렌지가 갑자기 모자라졌기 때문에 오렌지 주스 선물 가격도 덩달아 올라갔습니다. 근월물은 지난 28일 기준 1파운드당 151.55달러로, 연말 120달러대에서 한 달이 채 안 돼 약 30% 상승했습니다. 오렌지 주스 선물 가격을 급등시킨 감귤녹화병은 이번에 나타난 병이 아닙니다. 지난 2005년 플로리다에서 처음 발견됐다고 합니다. 온전히 전염병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후 오렌지 주스 선물 가격은 2006년, 2012년, 2016년 각각 한 번씩 200달러를 찍으며 폭등했다가 폭락했던 적이 있습니다.

상품(Commodity) 가격엔 공급과 수요 외에도 투기적 수요나 가수요란 요인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폭등 뒤엔 폭락이 따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가격 변동에서 차익을 내보려는 펀드들이나 원자재가 필요 없어도 쟁여놓으려는 수요는, 변곡점이 지났다고 생각하면 가차없이 매도하기 때문입니다. 진성 수요도 너무 비싸면 더 이상 주문을 넣지 않습니다.

오렌지 주스 선물은 작년 한 해 가장 뜨거운 원자재 중 하나였던 목재(lumber) 가격 추이를 연상케 합니다. 백신 접종이 진행되며 수요가 살아나면서 작년 초부터 상승하기 시작한 목재가격은 지난 4월 정점을 찍고 스스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델타 변이를 만나 여름부터 다시 상승 추세를 타기 시작하더니, 연말엔 오미크론을 만나 6개월 만에 1000달러선을 다시 넘어섰습니다.
목재(lumber) 선물 근월물 차트. (출처=바차트)
◇ 꼭 감귤녹화병, 오미크론 탓은 아니다

델타와 오미크론만 아니었다면 목재 가격은 다시 급격한 상승 추세를 타기 어려웠을 겁니다. 오렌지 주스 역시 감귤녹화병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가격 상승은 없었을 듯합니다. 다른 점은 오렌지주스는 2005년 이후 폭락과 폭등 패턴을 반복했단 것입니다. 아마 그때마다 감귤녹화병이 기승을 부렸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매년 감귤녹화병이 퍼졌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던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농부들은 2005년 처음 감귤녹화병이 퍼질 때 ‘곧 끝나겠지’란 생각을 했었을 겁니다. 이후 재현되는 전염병 확산을 겪을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겠지’란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게으르고 어리석었다고 할 수 만은 없는게 사실 감귤녹화병이 다시 나타날지, 아닐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오렌지 나무를 무턱대고 많이 심을 순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다 전염병이 더는 찾아오지 않는다면 창고에 쌓여 있던 오렌지는 급하게 재고정리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란 마음가짐이 오히려 오렌지 농장 주인으로선 합리적인 대응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플로리다의 오렌지 재배 면적은 감귤녹화병이 발견된 뒤 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줄어 현재 재배 면적은 2001년 대비 절반이라고 합니다. 지금 오렌지 주스 가격이 오르는 것을 감귤녹화병 탓만 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이미 감귤녹화병에 취약하기 그지없는 공급 부족의 환경이 조성돼 있었던 겁니다.

◇ ESG 눈치보는 석유, 가격 오르든 캐펙스가 늘든

구경제(old economy), 유형자산은 지난 10년간 구닥다리 취급을 받아왔습니다. 4차 산업혁명과 연결되는 신경제(new economy), 무형자산 등이 중심이 되는 세상으로 빠르게 넘어가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연히 구경제에 대한 자본적지출(CAPEX·캐펙스)도 줄어들었습니다. 석유산업의 캐펙스는 2015년엔 60억달러였지만, 2020년엔 20억달러로 4분의 1 토막이 났습니다.

그렇다고 석유회사들이 앞으로 케팩스를 늘릴까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트렌드에도 맞지 않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관측이 있습니다. 지금의 원유 등 에너지 인플레이션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수 있다는 러시아 때문이라고 만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기태 NH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10년간 지속된 구경제 부문의 투자 축소가 가격 상승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며 “설비투자가 늘거나 가격이 계속 오르거나 둘 중 하나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구조적 수요가 기대되는 산업은 어마어마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인텔은 지난 21일 오하이오주에 200억달러를 들여 첨단 반도체(advanced semiconductor chip) 공장 2개를 건설한다고 밝혔습니다. 향후 10년간 총 1000억달러를 투입해 확장할 계획도 있습니다. 실현될 경우 단일 공장으론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체 제조 단지가 됩니다. 13일 TSMC는 사상 최대 규모인 올해만 44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투자 규모 300억달러보다 47% 늘어난 것입니다. 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2021~2025년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에 총 800억달러의 신규 투자계획을 내놨습니다.

그러나 지금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다 해도, 결과는 몇 년 후에나 나옵니다. 팻 갤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반도체 부족이 2023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미국 상무부는 전 세계 150개 반도체 회사로부터 받은 자료를 취합한 결과를 발표하면서 “지금 수요가 2019년 수준보다 20% 더 많은 등 최소 6개월간 반도체 쇼티지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습니다.

◇ 궁즉통, 캐펙스 늘리는 기업에 이목 쏠린다

투자를 안 하든 지금부터라도 투자를 하든, 당장의 수요를 충족시킬 만한 공급은 불가능하단 점에서 원자재든 부품이든 가격이 더 오를까 하는 불안감이 있습니다. 물론 오미크론을 끝으로 코로나가 엔데믹(풍토병)이 되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하루아침에 화해한다면, 재난지원금을 다 쓴 미국인의 소비 여력이 떨어진다면 등 가격 상승을 촉발한 요인들이 일거에 제거된다면 공급이 얇더라도 꽤 안정적인 상황이 찾아올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투자자라면 이러한 확률에 맘 편히 베팅할 수 있을까요. 델타와 오미크론을 거치며 손을 덴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번에야 말로 공급 병목이 끝나겠지’ 보단 ‘본질은 공급이 얇다는 것이었고, 변이가 또 나타난다면 큰 손실을 볼 수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인플레이션에 적극 베팅하기보단 어느 정도 이를 헷지할 수 있는 포지션은 미리 잡아놓아야 원자재값 폭등이란 ‘재앙’은 면한다는 얘깁니다.
미국의 판매 대비 재고 비율. 2008년 금융 위기 수준까지 하락해 있다. (출처=FRED)
박소연 신영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올해 전망에서 투자 키워드로 ‘캐펙스’를 꼽은 바 있습니다. ‘코로나가 완전히 종료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제대로 맞서 싸우는 기업들에 점수를 주는 구간으로, 공급망 교란으로 전체 매크로는 여전히 어렵지만 단가인상, 재고비축, 투자확대가 핵심이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에너지, 반도체, 시클리컬 등 캐펙스 확대의 길목에 있는 기업들이 주도주가 될 거라고도 전망했습니다.

박 팀장은 “2000년엔 미국발 과잉투자, 2010년엔 중국발 과잉투자가 문제였다면 올해는 ‘과소투자’가 문제인 것 같다”며 “무형자산과 연구개발(R&D)에만 투자하다 보니 유형자산엔 너무 투자가 안 됐지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래서 의외로 가격이 상승할 수밖에 없었으며 새로운 투자는 가격 상승이 나타나는 곳으로 몰려드는 식으로, 궁극적으론 그렇게 문제가 풀려갈 것 같다”라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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