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사이에 '가족'이란 우주를 들였구나, '환쟁이' 장욱진

오현주 기자I 2021.02.01 03:30:01

현대화랑 '장욱진 30주기 기념전'
쪼그리고 앉아 손바닥만한 작은 화면 채우고
심플·단순의 미학, 순수·소박한 삶·철학 묻혀
평생 몰입한 '집·가족·자연' 테마로 52점 엄선

화가 장욱진은 입버릇처럼 되뇌어온 삶의 명제 ‘나는 심플하다’와 일맥상통한 작품세계를 구현했다. 목가적인 풍경과 어울리는 가족이란 주제는 ‘심플’로 무장한 채 세상과 연결되거나 세상과 거리를 뒀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가족과 나무’(1989), ‘소가 있는 마을’(1988), ‘가로수’(1978), ‘밤과 노인’(1990)(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아버지는 화백이라는 말을 질색하셨다. 화백이라는 말보다는 가족과 집을 좋아하셔서 집 가(家)를 쓰는 화가(畵家)라는 말을 더 좋아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매일 ‘나는 화가가 아니라 환쟁이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환쟁이’의 문제는 다른 데서 불거졌다. 학년 초마다 내야 하는 학생기록부였단다. 아버지 직업을 묻는 난을 채우는 게 아주 난감했던 거다. 아무리 아버지의 ‘정체성’이 그렇다 해도 ‘환쟁이’라고 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게다가 아버지는 그림 그리는 것이 일이지 직업은 아니라고 했다니. 딸은 고민 끝에 아버지의 직업을 ‘자유업’이라고 써서 냈단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참 잘 적은 것 같다”라고 회고했다.

화가 장욱진(1917∼1990), 아니 환쟁이 장욱진. 어느덧 여든이 넘은 장녀 장경수(82) 경운박물관장은 어린 시절의 아버지를 그렇게 기억했다. 그만큼 “아버지는 자유로웠다”고, “화가나 교수라는 직업의 명칭조차도 자유가 아니라 구속의 이름이었을 것”이라고, 그래서 “‘환쟁이의 붓대가 이런저런 말에 휘둘리게 되면 붓대를 꺾어야 해’라고 하셨”던 거라고.

장욱진의 ‘가족’(1973). 가족을 그린, 비교적 초기작으로 덕소시절(1963∼1975)에 완성했다. 17.9×25.8㎝ 크기의 화면에는 화가가 꿈꾸는 세상이 다 들었다. 해와 산, 나무와 집, 새와 가족까지(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런 장욱진에게도 자유롭지 못한 게 있었던 듯하다. 가족이다. 그이 인생을 지탱한 양대 축을 꼽으라면 ‘술’과 ‘그림’이었으니까. 남은 대놓고 말하지 못한 그것을 자신이 털어놓고 다녔더랬다. 인쇄한 활자로 박아두기도 했다. 유일하게 그이가 남긴 에세이집 ‘강가의 아틀리에’(1976)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십 년을 그림과 술로 살았다. 그림은 나의 일이고 술은 휴식이니까.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 다 써 버릴 작정이다. 남은 시간은 술을 마시고.” 그러곤 기꺼이 실행에 옮겼다. 그릴 수 없을 때까지 그림을 그렸고 마실 수 없을 때까지 술을 마셨다.

‘그래서’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인지, 대신 장욱진은 가족을 쉴 새 없이 그렸다. 집과 가족, 길과 나무, 또 까치와 동물. 참으로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이들 소재는 그이의 작품세계를 꿰뚫는 기둥으로 우뚝 섰다. “나는 누구보다 나의 가족을 사랑한다. 그 사랑이 그림을 통해서 서로 이해된다는 사실이 다른 이들과 다를 뿐.”

서울 종로구 삼청로 현대화랑서 연 장욱진 30주기 기념전 ‘집, 가족, 자연 그리고 장욱진’ 전경. 왼쪽부터 ‘툇마루’(1974), ‘마을’(1973), ‘가족’(1975)이다. 화가는 자연을 그리면서도 집은 빠트리지 않았고, 가족을 그리면서도 작은 집 마당에 풀어놓은 닭·오리는 놓치지 않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작은 그림에 우주 들여…자연적·상징적인 이상향

그이가 떠난 지 30년, 서울 종로구 삼청로 현대화랑이 장욱진 30주기를 기념하는 전시를 열고 있다. ‘집, 가족, 자연 그리고 장욱진’ 전이다. 테마에 걸맞은 대표작 52점을 어렵게 골라 걸었다. 사실 지난해에 열어야 했던 전시다. 코로나19가 막아선 탓에 해를 넘겼다. 비슷한 연배의 김환기(1913∼1974), 박수근(1914∼1965), 이중섭(1916∼1956). 유영국(1916∼2002) 등 한국 근현대미술 작가들과의 연대가 그랬듯 현대화랑은 그간 장욱진과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1978년 ‘장욱진 도화전’을 시작으로 2001년에는 ‘장욱진 10주기 회고전’을 2011년에는 ‘장욱진 20주기 기념전’을 열었더랬다.

향토색 물씬한 한국적 소재와 주제, 소박한 조형미는 박수근·이중섭과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장욱진의 화풍은 전혀 달랐다. 어린아이의 시선과 붓으로 그은 듯한 단순한 절제미가 무기였던 거다. 그저 소박하고 순진하고 따뜻하고 정겹다. 이는 그이가 늘 입버릇처럼 되뇌어온 삶의 명제 ‘나는 심플하다’와 일맥상통한다. 까치·나무·집·마을·소·닭 등 목가적인 풍경과 어울리는 가족이란 명제는 극단적인 ‘심플’로 무장한 채 세상과 연결되거나 세상과 거리를 뒀다. 지극히 자연적이고 지극히 상징적인 이상향이었다. 전시작을 굳이 ‘집, 가족, 자연’이란 모티프로 뽑아냈다지만, 사실 그이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모두가 장욱진의 ‘우주’에 다름 아니었다는 얘기다.

장욱진의 ‘초당’(1975). 자유분방한 구도와 획이 마치 어린아이의 눈과 붓을 빌린 듯하다. 27.5×15㎝ 크기의 화면에 화가가 꿈꾸는 이상향을 담백하게 녹여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런데 그 우주를 담아낸 그릇이 말이다. 고작 엽서만한 크기부터 A4 안팎이다. 이번 전시에 건 가장 큰 작품은 ‘황톳길’(1989)로 가로세로 46×46㎝. 맞다. 장욱진의 그림은 작다. 손 폭에서 벗어나는 건 지배할 수 없는 능력이라고 믿은 철학 때문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완성한 건 등을 잔뜩 구부려 쪼그리고 앉은 자세였다. 그이의 그림 대부분은 두 무릎 사이에 곧추세운 세필에서 나왔다.

1호도 안 되는 ‘자화상’(1951·14.8×10.8㎝)이 시작이다. 영국식 턱시도 차림의 신사가 황금빛 너른 벌판 외길을 따라 걸어나오고 있다. “세상이 어찌되든 내 길을 가련다”의 서막이었나. 그 뒤를 이어 ‘모기장’(1956), ‘얼굴’(1957), ‘나무 아래 아이’(1960) 등 혼자만의 세계에 잠시 머물던 그이는 이내 가족에게로 돌아온다. 창도 없는 작은 집에 네 가족이 밖을 내다보는 ‘가족도’(1972), 소 한 마리 개 한 마리 따르는 키 큰 나무 길을 세 가족이 줄지어 걷는 ‘가로수’(1978), 둥글고 큰 나무에 까치 한 마리 올리고 그 아래서 한낮 더위를 피하는 가족이 등장하는 ‘가족과 나무’(1989) 등등. 전시작의 끝은 ‘밤과 노인’(1990)이다. 그간 걸어온 길·집·풍경을 뒤로 하고 어두운 밤하늘에 흰옷 입은 도인을 올린 그 작품은 타계하던 해에 그렸다.

장욱진의 ‘나무와 까치’(1989). 타계 한 해 전 그림이다. 후기로 갈수록 색감은 화사해지고 유유자적하는 사람·사물들이 눈에 자주 띈다. 37.9×45.5㎝로 비교적 큰 작품 축에 든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소박한 평화 속에 함께 살다…가족과 까치와

52점 전시작이 굳이 연대기적 나열이 아님에도 그리 따를 수밖에 없는 데는 이유가 있다. 덕소(1963~1975), 명륜동(1975~1979), 수안보(1980~1985), 신갈(1986~1990)로, 그이가 옮겨 다닌 ‘아틀리에’가 만든 미묘한 변화 덕이다. 전기도 수도도 없던 곳에서 홀로 머물던 시간이 많았던 덕소시절에는 짙은 외로움을 잔뜩 묻혀 두더니, 가족과 함께 살았다는 명륜동·수안보시절에는 그이가 낼 수 있는 최절정의 화사한 빛을 냈다. 신갈시절로 넘어오면서는 여기에 마치 생을 달관한 사람처럼 유유자적을 보탰다고 할까.

덕소시절(1963∼1975) 화가 장욱진. 경기 양주군 미금면(지금의 경기 남양주시 삼패동)에 열 평 남짓한 시멘트 집을 짓고 가족과 떨어져 작업에 매진했다. 유일한 저서 ‘강가의 아틀리에’(1976)는 그 덕소 작업실을 말한다. 오른쪽은 작업실 벽에 그려뒀던 ‘동물가족’(1964). ‘장욱진 30주기 기념전’을 열고 있는 현대화랑 벽면에 그대로 옮겨왔다(사진=강운구·현대화랑·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평생 가족 곁에 둔 ‘까치’는 장욱진을 화가로 만든 계기이자 결과다. 일본 유학시절 몸이 온통 까맣고 눈만 하얀 ‘까치’ 그림이 ‘전일본소학교학생미전’에서 1등을 차지했던 거다. 본격적인 그림공부는 1939년 도쿄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며 시작됐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내기도 했지만(1954∼1960) 6년 만에 접어버리고 이후 30년을 전업작가로 살았다. 술을 본격적으로 마신 것도 한국전쟁 이후 망가진 시대를 목도하면서부터라고 주위에선 말한다. 그러니 가족부양 의무는 온전히 아내 이순경(102) 여사의 몫이 될 수밖에. 또 한 명의 ‘위대한 화가의 아내’로 기록될 이 여사는 서점을 운영하며 열다섯 살에 세상을 떠난 막내까지 6남매를 교육시켰고 남편과 그이의 예술을 지켜냈다.

장녀 장 관장은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역할을 못한 것에 죄책감이 있었다”고 말했더랬다. 하지만 “자식마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다고 느낄 정도로 아버지 사랑은 늘 넘치고 부드럽고 따스했다”고 했다. “그런 아버지를 형제들은 가엾이 여겼다”고. 마땅하지 않은가. 장욱진이 완성한 우주는 ‘가족’이었다는 것이. 절반은 그림에, 절반은 현실에 있었다. 전시는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로 현대화랑서 연 장욱진 30주기 기념전 ‘집, 가족, 자연 그리고 장욱진’ 전경. 한 관람객이 작품 감상에 빠져 있다. 왼쪽부터 ‘들’(1986), ‘들 풍경’(1988), ‘가족과 나무’(1989), ‘길’(1987), ‘노인’(1988)(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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