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후백제 국왕 견훤은 토룡(土龍)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그의 어머니가 정을 나누던 남자는 정체가 모호했는데, 뒤를 밟아봤더니 토룡이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삼국시대 영광을 뒤로 한 후삼국의 일개 왕을 `천하`를 호령하는 용으로 빗대긴 궁색했던 탓이라고 후손들은 말한다. 그러다 보니 `지하`를 휘젓는 토룡이라도 붙여준 게라고. 토룡, 흔히 지렁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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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의 논문을 거쳐 지렁이는 새롭게 탄생한다. 논문은 지렁이가 먹이 활동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토양은 기름져가는 걸 짚어냈다. 흙을 먹고사는 지렁이의 배변은 자체로서 천연 비료다. 지렁이가 땅속 길을 내어 뭉친 흙을 풀어헤치면, 농작물이 편하게 뿌리 내렸다. 작황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이로써 공기는 토양에 더 넓고 깊게 스몄다. 땅이 쉽게 숨을 쉬었다. 이렇게 조성된 옥토는 농경 사회 기반이었다. 인류가 문명을 일구는 과정에 일조한 농경사회는 지렁이가 지탱했다는 의미다.
생태계 전반으로 보더라도 지렁이는 이로운 생명체다. 굳이 다윈의 논문을 들추지 않더라도 알만한 사실이다. 땅이 기름지면 풀이 잘 자라고, 초식 동물 성장을 도와, 육식 동물 생존에 보탬이 된다. 먹이 사슬로 보면 맨 밑에 있는데, 지천으로 널린 것이 잡기도 아주 쉽다. 설치류, 조류, 육식성 곤충 등이 천적인데 제대로 저항을 못한다. 잡혀먹히는 줄도 모르고 잡혀먹힌다는 게 적절할 것이다. 낚싯바늘에 걸면 물고기를 낚아올리는 미끼로서도 손색없다.
지렁이는 약재로써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 성질이 찬 지렁이가 해열에 탁월하다고 동의보감은 전한다. 이뇨(오줌을 나오게 작용)를 돕고 황달을 다스리며, 회충을 박멸하는 데에 효능이 있다. 어린이의 뇌전증을 치료하는 데에는 지룡즙(지렁이 즙)을 마시라고 권한다. 산 지렁이에 소금을 뿌리면 삼투압 현상으로 지렁이의 체내 수분이 체외로 빠져나온다. 이렇게 나온 수분이 지룡즙이다. 이걸 더운물에 희석해서 마시라고 한다. 토룡탕은 보양식으로도 알려져 있다. 노폐물을 씻어내어 말린 지렁이를 먹는 것인데, 음식보다 건강보조제에 가깝다.
실제로 동의보감은 지렁이를 음식으로는 먹지 말라고 한다. 동의보감 탕액편 충부(蟲部)를 보면 구인(지렁이)과 구인시(지렁이 똥)를 `식품으로 사용할 수 없는 원료`로 구분한다. 지렁이를 먹었다는 구전을 보면 이런 정서가 보편적이다. 살림이 궁핍한 어떤 집안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지렁이를 고기라고 속여서 먹였는데, 지극한 효심이라고 평가하는 한편 노인 학대는 비판도 함께 제기된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먹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