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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에 겹친 폭우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더욱 늘어나 모처럼 그리스 고전 몇 권을 읽었다. 지금처럼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사기도, 빌리기도 어렵던 학창 시절 우연히 낡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구해 읽기는 했다. 그때는 책에서 반복되는 전투나 모험 이야기가 지루하게 여겨졌는데, 이제 고전의 힘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듯하다. 나이가 들면서 인식과 사고에 변화가 생겼겠지만, 그보다 원로학자 천병희 선생이 그리스어 원전을 우리말로 옮기고 다듬고 깊은 해설을 더한 덕분이다. 오로지 개인의 의지와 분발로 이룬 문화적 위업에 경탄하게 된다.
고전이 수백년, 길게는 수천년 세월의 풍파를 견디면서 전해올 수 있던 힘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본질과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에서 나왔으리라. 트로이아 함락 후 귀향길에 오른 오디세우스가 겪은 온갖 고난은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 삶의 모습과 유사하다. 우리가 바이러스가 퍼지거나 연일 폭우가 퍼붓는 섬으로 흘러들어 간 것이 아니라, 이 전혀 반갑지 않은 손님이 우리를 찾아온 것일 뿐. 이렇게 인생은 하나의 난관을 지나면, 때로 그 난관을 미처 지나기도 전에 다른 난관이 계속 닥쳐온다.
그리스 고전에서 유한한 인간은 올림포스에서 영원히 사는 신과 대비된다. 트로이아의 멸망, 아킬레우스의 단명, 오디세우스의 귀향 등 모든 것이 신이 정한 대로 이루어진다. 필멸의 인간은 신의 뜻과 주어진 운명을 거부할 수 없다. 한편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인내하면서 용기와 지혜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그 다음은 다시 신의 영역이다.
폭우가 끝을 보이기 시작하자, 수그러드는 듯하던 코로나 19가 우리의 방심을 틈타 다시 빠르게 확산되는 사태를 맞이하였다. 기대하던 일상의 회복이 요원해 보이니 실망감이 크다. 코로나 팬데믹, 기상이변과 같은 작금의 위기를 겪으면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다시 깨닫는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오디세우스 일행은 세이렌 자매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뱃사람을 유혹하고 목숨을 앗아가는 바닷길을 지나가게 된다. 오디세우스는 요정 키르케의 경고에 따라 선원의 귀를 밀랍으로 틀어막아 노를 계속 젓게 하고 자신의 몸은 돛대에 꽁꽁 묶어 세이렌의 노래를 경험하면서도 위험은 모면한다. 일행이 트리나키에 섬에 고립되어 굶주리게 되자 다른 전우들은 태양신 헬리오스의 소를 잡아먹고 그 벌로 바다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모두 죽음에 이른다. 신의 뜻을 어기기 않으려고 굶주림을 감내한 오디세우스만이 난파된 배에 의지하여 바다를 떠다니면서 살아남고 끝내 고향 이타케로 돌아간다.
지역을 불문하고 고대 신화에서 신이 인간을 벌할 때 동원하는 수단이 바로 역병과 홍수이다. 신이나 운명은 자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겠다. 지금 우리는 자연의 조화와 질서를 훼손한 대가를 톡톡히 치루는 중이다. 위기를 극복하고 생존하려면 지금이라도 자연이 보내온 경고에 겸허하게 귀 기울여야겠다. 상황에 따라 등교, 대면예배, 뜻이 맞는 이들과의 회합 같은, 그동안 당연하게 누려온 즐거움과 편리함을 희생하는 지혜와 용기, 오랜 기간 참아내는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면 ‘참을성 많은’ 오디세우스를 키르케나 아테나가 도와준 것처럼 신과 운명이 우리 편이 되어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