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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가는 과연 낭만의 장소였을까? [물에 관한 알쓸신잡]

이명철 기자I 2022.04.16 11:30:30

물 긷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우물가

[최종수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 조선의 풍속화가 김홍도의 풍속화첩 중에 ‘우물가’라는 그림을 본 적 있으세요? 워낙 유명한 그림이기 때문에 그림 내용을 설명하면 어떤 그림인지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림의 배경은 우물가이고 한량으로 보이는 한 사내가 갓을 벗고 앞섶을 풀어헤친 채 여인에게서 물을 얻어 마시고 있습니다. 물을 얻어 마시는 사내의 음흉한 눈빛이 여인들을 쳐다봅니다. 사내 표정으로 봐서는 정말 목이 말라 우물가에 온 것인지, 아니면 작업을 걸러 온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홍도 ‘우물가’. (이미지=국립중앙박물관)


사내의 민망한 행동에 젊은 새댁으로 보이는 두 여인은 두레박으로 물을 떠 주면서도 눈길을 돌려 애써 외면합니다. 사내 뒤에서 이 모습을 못마땅하게 눈을 흘기고 있는 뚱뚱하고 나이 든 여인의 모습이 대비를 이뤄 그림을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우물가는 주로 여자들의 공간이었습니다. 남자가 우물가를 찾는 경우는 흔치 않았기 때문에 물 한 바가지를 주고받은 인연으로 사랑이 싹트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그 사랑이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 오씨, 조선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는 모두 우물가에서 물 한 바가지의 인연으로 맺어진 사랑입니다. 두 커플이 우물가에서 만난 일화는 등장인물만 다른 뿐 전개되는 시나리오는 똑같습니다.

왕건과 이성계는 목이 말라 우물가에 들러 여인에게 물 한바가지를 달라고 청하고 두 여인은 물이 담긴 바가지에 나뭇잎을 띄워서 건넵니다. 나뭇잎을 왜 띄웠냐고 묻는 말에 대한 두 여인의 대답도 똑같습니다. “물을 급히 마시면 체하실까 싶어 나뭇잎을 불어 가며 천천히 드시라고 띄운 것입니다.”

김홍도의 그림이나 왕건, 이성계의 일화로 보면 우물가는 감성 넘치는 로맨틱한 장소로 비춰집니다. 특히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우물가는 목마른 갈증도 달래고 남녀가 유별했던 시기에 여인에게 ‘작업’을 걸 수 있는 기가 막힌 장소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팍팍한 일상의 많은 부분을 우물가에 의지해야 했던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우물가는 물 긷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고단한 삶이 찌덕찌덕 눌러 붙은 곳입니다.

물 긷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이었는지 김홍도의 ‘우물가’ 그림으로 돌아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림의 아낙들이 머리에 이고 있는 물동이의 크기와 무게는 얼마나 될까요? 대충 눈대중으로 어림잡아 보아도 만만한 크기는 아닙니다.

당시 옹기로 만든 물동이 크기는 보통 한 말 정도였는데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18ℓ 정도였습니다. 담긴 18ℓ의 물이 18kg이므로 옹기로 된 물동이 무게까지 합치면 물을 채운 물동이 무게는 20kg이 훌쩍 넘었을 겁니다.

사무실이나 공공장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생수통 무게가 20kg 정도이니 생수통보다 더 무거웠습니다. 사무실에서 어쩌다 한 번 생수통 갈아 끼우는 것도 만만치 않는 상황에 비춰보면 옛날 우리 어머니와 누이들이 머리에 이고 다녔던 물동이는 고달픈 삶의 무게만큼이나 버거웠을 듯합니다.

어렵사리 물 한 동이를 길어 와도 20ℓ가 채 안 되는 물은 대가족이 쓰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물동이를 이고 우물을 왕복하는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하루에 20ℓ 이상의 물이 필요한데, 우물을 사용하던 시대의 평균 가족 수를 7명이라고 가정하면 한 집에서 매일 필요한 물은 140ℓ나 됩니다.

물 일곱 동이는 족히 필요하고 이 물을 길어오는 역할은 오롯이 여자들 몫이었습니다. 우물가를 감성 넘치는 로맨틱한 장소로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물 긷는 일은 허드렛일로 여겨졌고 늘 여자 몫이었습니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아이들 씻기고 음식 준비하는 여자의 집안일은 많은 물을 필요로 합니다. 허드렛일 정도로 생각한 물 긷는 일은 의외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합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우물가에 배어 있던 어머니와 누이들의 한숨과 눈물은 1970년대 들어 상수도가 보급되면서 줄어들었습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상수도 보급률은 99.4%입니다. 일부 도서 지방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지역에 수돗물이 공급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제는 우물가의 눈물 섞인 애환도 달달한 로맨스도 우물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여인들이 겪었던 우물가의 고단함이 우리나라에서는 먼 옛날이야기가 되었지만 다른 나라로 눈을 돌려 보면 상황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물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나라가 겪고 현실은 과거 우리가 겪었던 상황보다 더 혹독합니다.

물을 구하기 위해 훨씬 먼 거리를 걸어야 하지만 깨끗한 물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먼 길을 걷고 긴 기다림 끝에 물을 길어 온다는 것은 노동 강도뿐만 아니라 노동 시간이 길다는 의미입니다.

하루에 많은 시간을 물 긷는 일에 써야하기 때문에 학교를 갈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합니다. 교육 기회가 적어지면 취업이 어려워지고 재정적인 안정을 찾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빈곤이 심화되는 악순환이 이어집니다.

이들에게 나쁜 소식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기상이변으로 가뭄이 심해지면서 물을 구하기 위해 걸어야 하는 거리가 점점 늘어난다는 겁니다. 물이 부족해지면 물을 둘러싼 인근 부족 간의 갈등도 심화됩니다.

일촉즉발의 부족 간 갈등은 상대의 가장 약한 곳을 공격합니다. 그 대상은 바로 물을 찾아 헤매는 이웃 부족의 여자입니다. 물을 구하러 먼 길을 오가는 과정에서 성폭행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후변화의 원인은 화석연료 과다 사용으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늘어난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장의 땔감조차 부족한 그들에게 이 사실은 마치 별나라 얘기처럼 들립니다. 안타깝게도 별나라 얘기 같은 기후변화로 그들이 감내해야 할 현실은 너무나 가혹합니다.

■최종수 연구위원(박사·기술사)은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 △University of Utah Visiting Professor △국회물포럼 물순환위원회 위원 △환경부 자문위원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자문위원 △대전광역시 물순환위원회 위원 △한국물환경학회 이사 △한국방재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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