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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다리 솟고 갈매기 슬피울던"…부산 속살 보이소

오현주 기자I 2013.10.17 07:44:37

외지인이 바라본 '부산의 힘'
이태리타월·밀면·조용필까지 낳아
역사·문화 간직한 도시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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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넓다
유승훈|444쪽|글항아리

[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김원일의 소설 ‘깨끗한 몸’에는 청결벽이 있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어머니는 아들 길남이의 때를 벗기고 또 벗긴다. 고문에 가까운 목욕. 비단 소설 속 얘기만이 아니다. 한국전쟁 중 사회주의자인 남편이 실종되고 홀로 아이를 키워야 했던 어머니에게 목욕은 일종의 정화의례였다.

그런데 이 같은 청결의식이 개인 신체에 국한된 게 아니란 시각이 있다. 역사적 경험을 거쳐 형성된 관념이란 것이다. 광복 후 이승만 정부나 뒤이은 군사정부도 일제강점기의 위생국가‘주의’를 이어받았다는 논지다. 아무리 대를 벗겨내도 성에 차지 않자 종국엔 때를 제거하기 위한 도구까지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이태리타월이다. 부산서 직물공장을 운영하던 한 사장이 고안했다는 대단한 발명품. 이후 한국목욕사는 뒤집혔다. 이태리타월의 등장은 온천욕의 원조이자 1960년대 섬유공업이 크게 발달했던 부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역사 한가운데 부산을 ‘띄웠다.’ 하나로 관통할 순 없지만 열쇳말은 있다. ‘부산은 넓다’다. 그런데 이 해석이 단순치 않다. ‘넓다’의 의미에 자연만이 아니라 역사의 품, 문화의 너비까지 심어놨기 때문이다. 그 정수를 들여다본 이는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다. 민중의 옛 풍속을 연구해온 역사민속학자의 기질까지 십분 발휘했다.

바탕에 펴둔 건 인문학이다. 다만 최근 ‘시장경제논리’로만 키워온 인문학에는 수정을 요구했다. 본래대로 사람을 중심에 두자는 거다. 생각과 말,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람의 본질을 탐구하는 인간학이란 입장을 최대한 살렸다. 거시보다는 미시다. 부산을 대하는 낮은 자세도 거기서 나왔다. 산동네, 노래방, 밀면, 영도 할매 같은 소재가 부활했다. 제도권에선 밀려나 있던 재료가 책에선 또 다른 원형을 갖췄다. 그럼에도 외지인이란 자격은 편치 않았나 보다. “조용필이 ‘머리가 깨지든 바위가 깨지든 우선 들이대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부산과 부딪쳤다”고 썼다.

▲역사성…영도다리, 부산 지배하는 눈물겨운 정서

왜 하필 조용필인가. 저자는 부산의 정서가 조용필을 만든 데 일조했다고 봤다. 1975년 발표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대연각호텔 화재로 숨진 젊은 가수 김성술의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개작한 것이다. 노래의 대성공엔 조용필의 기량뿐만 아니라 오래전부터 불려온 부산항의 서정이 깔려 있었다는 얘기다.

피란살이 기억에서 부산의 감성을 짚어나간 저자는 부산의 지배적 정서는 눈물이라고 봤다. 관부연락선, 파월장병들의 이별항 등을 보라고 했다. 여기서 빠트리지 말아야 할 것이 영도다리다. 전쟁 혹은 산업화에 상처입은 시민들이 줄지어 투신하던 장소. 한때 ‘죽음의 다리’로 불렸던 ‘영도’의 상징은 더 있다. 1934년 완성된 다리는 ‘동양 제일의 도개식 장치’로 유명세를 치렀다. 1966년 기능을 멈출 때까지 하루도 멈춤 없이 들고 내리며 무거운 교통과 하중을 견뎠다. 부산이 눈물겨울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했다.

한국전쟁 이후 불안한 심리와 우울한 시대배경이 접목되자 시민들은 ‘점치는 일’을 생활로 삼기도 했다. 전국서 밀려온 피란민과 점쟁이들이 부산 영도다리 아래로 몰려들었다(사진=글항아리).


▲정체성…‘부산=항구’

길 가는 누군가를 붙들고 부산의 정체성을 물어본다면? 저자의 대답은 확고했다. “부산은 항구다.” 맞다. 구석기 시대인이 패총을 남겼고, 조선시대 통신사를 파견한 출발지도 부산이다. 왜란 때는 침략군의 첫 상륙지면서, 한국전쟁 중엔 전국 피란민을 받아들였다. 박정희 정권 때는 베트남행 장정들이 ‘잘 있거라 부산항’을 목놓아 불렀고, 이후엔 원양어선을 탄 뱃사람이 이역만리로 떠났다.

하지만 부산은 항구 이상이다. 곧 사람살이의 창구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이태리타월은 찜질방의 기원으로 이어졌고, 조선통신사가 ‘조내기 고구마’를 처음 들여왔으며, 우암동 밀면이 탄생했다. 전쟁통에 소설가 김동리는 다방커피를 마시며 소설 ‘밀다원 시대’를 썼다. 가라오케를 탈바꿈시킨 노래방도 부산이 창구였기에 가능했다.

▲브랜드…‘넓은 부산’ 발목 잡은 건 ‘제2의 도시’

다만 ‘넓은 부산’의 발전을 옥죄던 관념도 있다고 했다. ‘부산은 제2의 도시’가 그것. 정말 부산은 여전히 제2인가. 이 배경에 버티고 있는 건 전쟁 이후 산업·인구·무역을 급격하게 키워 온 ‘경제신화’다. 저자의 문제제기는 여기에 있다. ‘경제신화’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만족하고 있다면 끝까지 2위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울을 따라하는 게 별 재미를 못 보는 시대가 왔다는 걸 알아채란 말이다.

이쯤에서 꺼내 든 카드가 다시 조용필이다. “조용필의 끈기는 항구의 정신과 통한다. 부산의 개방성은 그저 빗장을 여는 수동적 형태가 아니다.” 경기 화성 출신인 조용필이 부산에서 활동하며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판으로 ‘가왕’이 된 게 우연이 아니란 뜻이다. 시대의 순환 속에서 미래를 재생하는 것. 바로 그 인문정신에서 부산을 찾으라 했다. 흔히들 볼썽사납게 늘어놓는 역사콘텐츠 원조 싸움 따윈 그만하자는 얘기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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