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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인식에는 유족과 학전 관계자들,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다. 오전 8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떠난 운구는 오전 8시 15분 아르코꿈밭극장(옛 소극장 학전) 앞마당을 둘러본 뒤 장지인 천안공원묘원에 모셔진다.
경기도 일산 자택에서 통원 치료를 받으며 위암 투병을 해온 고인은 병세가 악화해 지난 21일 밤 8시 26분 위암 합병증인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조카인 김성민 학전 총무팀장에 따르면 10남매의 막내인 고인은 보고 싶었던 가족들을 모두 만나고 눈을 감았다. 세상을 떠나기 3~4개월 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고맙다, 나는 할 만큼 다 했다, 미안하다”고 한 것이 고인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말이 됐다.
1951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경기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69년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대학 수업과 맞지 않았던 고인은 대학 동창이자 현재 디자이너로 활동 중인 김영세와 ‘도깨비 두 마리’의 약자인 ‘도비두’라는 포크 밴드로 활동하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1970년부터 본격적인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1년 ‘아침이슬’, ‘꽃 피우는 아이’, ‘늙은 군인의 노래’ 등을 수록한 1집 음반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발매 당시엔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받았지만, 1972년 ‘10월 유신’과 함께 앨범 수록곡 대다수가 금지곡이 되면서 음반 또한 전량 압수됐다. 고인의 데뷔 음반이 그의 마지막 정식 음반이 됐다.
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음악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다. 고인의 관심은 늘 소외된 곳을 향했다. 생계를 위해 봉제 공장과 탄광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노래로 담아냈다. 1978년에는 노동자 인권의 현실을 담은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작사·작곡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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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독일 작품을 한국적으로 각색한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한국 창작뮤지컬 역사에 한 획을 새겼다.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등 어린이 공연도 다수 제작했다. 학전을 운영하며 예술가의 정당한 대가를 보장하기 위해 서면 계약서와 러닝 개런티 제도를 도입한 것도 유명하다.
문화예술계는 소외된 이들을 노래했고, 남들 앞에 나서지 않으며 ‘뒷것’을 자처했던 고인의 한결같은 삶을 애도했다. 학전 출신 배우 장현성, 황정민, 가수 이은미, 권진원, 박학기, 장기하, 알리 등이 고인의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고인과 대학 시절부터 친분을 나눈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도 빈소를 찾아 명복을 빌었다. 가수 윤상, 배우 박원상, 문성근, 강신일, 이병준, 류승범, 김희원, 김대명, 배성우 등도 빈소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