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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한양의 거주 양상을 살펴보면 신분별·직업별로 모여 사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 후기 한양 인구는 약 19만명으로, 한양은 동·서·남·북·중 5개 지역으로 나눠 동촌은 반인(伴人)과 무관, 서촌은 하급관리, 남촌은 남인과 소론·소북, 북촌은 양반과 종친, 중촌은 중인과 시전 상인이 주로 살았다.
양반들의 경우 서울 곳곳에 세대를 거듭해 모여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거주 지역명이 본관의 별칭처럼 불리기도 했다. 한곳에 오래 모여 거주하다보니 집안의 고유한 문화가 지역성으로 자리 잡은 경우도 많았다.
예컨대 조선 500년간 회현동에 대대로 살았던 동래정씨(東萊鄭氏)는 회현동의 이름을 따 회동정씨(會洞鄭氏)로 불렸다. 회동정씨는 조선 개국 이래 회현동에 세거하면서 한양 조망이 가능한 쌍회정, 재산루, 홍엽정 등을 조성했고 인근 남산의 경관을 형성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서울의 오래된 저택으로 국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인이 바뀌지 않은 저택도 있다. 건천동(乾川洞)의 조씨(趙氏)저택, 주자동(鑄字洞)의 권씨(權氏)저택, 숭례문(崇禮門) 밖 순청동(巡廳洞)의 유씨(柳氏)저택, 돈의문(敦義門) 밖 아현(鵝峴)의 황씨(黃氏)저택 및 황화방(皇華坊)의 김씨(金氏) 저택 등이다.
지역 이름이 붙지는 않았으나 북촌과 용산일대에서 세거한 전주이씨(全州李氏)도 있다. 전주이씨 영해군 파는 인왕산 기슭과 용산의 본가, 두릉(반포)의 별서, 광주 및 저자도의 선영을 운영했는데 한 집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본가와 거주지를 이동하면서 어떠한 생활을 영위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사례다.
최병구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조선시대 한양의 명문가의 거주 실태를 연구한 결과 본관을 떠나 지역명을 성씨 앞에 붙여 통용하는 경우 등 흥미로운 사실들이 발견됐다”며 “앞으로도 시민들에게 서울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