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한성필 개인전 '지극의 상속' 북극·남극 오가며 8만여컷 촬영 문명·역사 담은 30여점 엄선 아라리오갤러리서 2월 22일까지
한성필 작가의 ‘피라미든, 스발바르, 아크틱 오션2’. 북극해 연안 노르웨이의 스발바르군도에서 한때 탄광마을로 유명했던 피라미든의 폐광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사진=아라리오갤러리).
[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산악인들은 등로주의와 등정주의를 놓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다. 어떤 방식으로 산을 올라갈 것인가와 어떤 산의 정상에 오를 것인가. 이제 처녀봉은 거의 없다. 등로주의만 남은 셈이다. 예술도 비슷하다. 무엇을 표현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오는 2월 22일까지 열리는 ‘지극의 상속’ 전은 사진작가 한성필(43)이 찍은 북극과 남극의 극지의 풍경을 전시한다. 2013년 말과 2014년 초까지 촬영한 작품 30여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작가의 사진에는 TV다큐멘터리에서 본 것과는 다른 풍경이 담겨 있다. 그가 주목한 것은 극지에 남아 있는 문명과 시간의 흔적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한 작가는 “북극과 남극 하면 대개 강추위와 함께 북극곰과 이누이트, 오로라, 팽귄과 빙하를 떠올린다. 고정관념처럼 각인된 극지의 풍경을 다르게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실 북극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일확천금을 꿈꾸며 무분별하게 탄광을 개발한 곳이었고 바다의 로또였던 고래잡이의 전초기지였다. 또 남극은 수억년 지구의 시간이 축적된 빙하의 조각전시장이었다. 한 작가는 “지극한 천연 숭고미의 표상으로 간주해 온 극지는 자원을 대량 확보하기 위한 인간적이고 문명적인 역사 또한 간직하고 있다”며 “눈에 보이는 순백의 역사뿐만 아니라 동물의 살육과 인간의 탐욕이 엉켜있는 붉은 역사도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
남극 빙하의 단면을 담은 한성필 작가의 ‘베스티지 오브 타임1’(Vestige of Time1)(사진=아라리오갤러리).
한 작가는 공사 중인 건물 가림막을 찍는 ‘파사드 프로젝트’로 유명하다. 이미지와 실제의 간극을 사진과 비디오 작업 등으로 보여주며 주목받았다. 덕분에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아르헨티나 국립미술관, 미국 펜실베이니아 포토미디어센터, 일본의 기요사토 사진박물관, 중국 상하이 현대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시간의 흔적’ 연작은 남극의 빙하 단면을 찍은 것이다. 한지에 현상해 마치 거대한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한 작가는 “내린 눈이 겹겹이 쌓여 생긴 층들은 그 위에 흘러간 무수한 시간의 결을 보여준다”며 “거기서 차갑게 얼어붙은 시간의 영원성을 본다”고 전했다. 또 노르웨이의 스발바르제도에서 찍은 폐광과 폐선 사진들은 북극에서 벌어진 참혹한 수탈의 역사와 인간의 탐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한성필 작가가 촬영한 남극해 사우스 세틀랜드 제도 디셉션 아일랜드의 쇠락한 포경기지 풍경. 디셉션 아일랜드는 20세기 초반 노르웨이의 포경회사들이 기지를 설치해 1931년까지 14만배럴의 고래기름을 생산했으나 이후 가격이 폭락하고 1970년 화산폭발이 일어나며 폐허지가 됐다(사진=아라리오갤러리).
한 작가는 “등정주의는 정복이란 관점에서 비롯했다”며 “이제는 등로주의처럼 앞으로 향하는 길 속에서 우리가 상속받는 것과 앞으로 무엇을 남겨줄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극지에 대한 접근도 등정주의보다 등로주의를 택했다는 설명이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한 작가의 사진을 두고 “‘다큐멘터리’라는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위해 시각적으로 착취당하는 자연에 위엄을 되돌려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평하기도 했다.
한 작가가 선보인 사진들은 북극과 남극에서 각각 찍은 4만컷씩 총 8만여컷의 사진 중에서 골라낸 작품들이다. 북극에 다녀오는 데는 두 달, 남극에 다녀오는 데는 한 달여가 걸렸다. 북극과 남극 관련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지원해 얻어낸 성과다. 이번 전시에 이어 오는 5월에는 쿠바 아바니비엔날레의 메인 전시인 ‘개념과 경험 사이’에 초대받아 아니시 카푸르, 다니엘 뷔랑, 티노 세갈 등 세계 정상급 작가와 대규모 설치작업을 펼칠 예정이다. 02-541-5701.
한성필 작가가 북극의 폐광 근처에서 찍은 ‘웨이트 오브 타임3’ 앞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김용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