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전 서울 강서구의 한 대형마트. 60대 여성 이모씨가 채소코너를 둘러보다 발길을 돌렸다. 그가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은 상추 한 봉지의 가격은 4990원이지만 봉지 안에 담긴 상추는 20여장뿐이었다. 이씨는 “제철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뭐 하나 안 비싼 게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폭염과 집중호우로 인한 농축산물 가격이 급등하면서 밥상물가에 비상이 걸렸다. 장마철 농축산물 값이 오르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올해는 특히 예년보다 빨리 찾아온 폭염과 물폭탄급 폭우로 농가 등의 피해가 커지면서 가격이 가파르게 올랐다. 아직 끝나지 않은 장마와 뒤이은 폭염, 태풍 발생 가능성에 9월 말 추석 명절까지 브레이크 없는 가격 오름세가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 ‘한주먹’ 시금치 6990원…“안 비싼 게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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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채소가격은 최근 천정부지로 올랐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산물유통정보를 보면 이날 기준 적상추(상품) 도매가격은 8만7340원(4㎏)으로 불과 한 달 전(1만9305원)보다 무려 352.4% 뛰었다. 역시 폭염과 장맛비에 시달렸던 지난해 이맘때(4만945원)와 비교해도 두 배 넘게 비싼 금액이다.
시금치(상품·4㎏)도 5만9980원으로 한 달 전과 비교해 225.8% 올랐다. 평년 이맘때 가격은 2만6583원으로 반값도 채 되지 않았다.
이외 애호박(상품) 도매가는 20개에 3만8380원으로 한 달 전보다 141.9%, 깻잎(상품) 도매가격은 2㎏에 3만9520원으로 한 달 전에 비해 107.9% 올랐다.
대형마트 고객들의 ‘불만족’은 가격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날 오후 서울 양천구의 B대형마트에서 만난 60대 여성 김모씨는 “장마 때문인지 다 물렁하고 눅었다”며 양질의 대파를 한참 골라냈다.
폭우·폭염으로 인한 가격 상승, 품질 저하 등의 문제로 채소 소비는 줄어드는 분위기다. A마트 한 직원은 “평소엔 오전에만 다섯 번(채소) 물량을 채웠는데 요새는 서너 번 정도”라며 “아무래도 값이 비싸다보니 채소를 사가는 손님들이 줄었다”고 했다. B마트 관계자는 “덜 팔리기도 하지만 입고되는 물량도 줄었다”며 “양상추, 파프리카는 요새 안 들어오고 시금치도 불규칙하게 들어온다”고 했다.
대형마트보다 구매 경쟁력이 낮은 전통시장 사정은 더 좋지 않았다.
상인들은 덥거나 비오는 변화무쌍한 한여름날에 시장을 찾는 손님 자체가 줄어든 데다 대폭 오른 채솟값에 장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단 하소연을 쏟아냈다. 서울 마포구 아현시장에서 과일·채소 판매점을 하는 장모씨는 “도매가격이 너무 올라 뭘 팔아도 크게 남지 않는다”며 “채소나 과일은 오래 보관하기도 어려워서 조금씩 더 얹어파는 식으로 팔고 있다”고 토로했다. 서울 강서구에서 과일· 채소 등을 판매점을 운영하는 정모씨도 “오후 들어서 떨이로 팔아도 잘 안 팔린다”며 “가지, 고추가 시들한데도 비싸니까 어지간히 값을 낮추지 않으면 사람들이 구매하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 대형마트업계 공급량·가격방어 ‘사활’…“정부 수급 관리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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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기후로 인한 작황 부진 등이 추석까지도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장마는 남부지방 등에서 아직도 이어지고 있으며 장마가 끝나면 폭염과 태풍까지 예고돼 있어서다.
대형마트업계는 공급량과 가격 방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채소류의 경우 대체 산지를 확보하고, 유통규격에서 등급 외로 분류되나 품질에는 문제가 없는 이른바 ‘못난이 채소’를 싸게 내놓는 식으로 공급 안정화를 꾀하고 있다. 소·돼지와 닭고기 등 육류 가격 상승세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마진 최소화, 포장 간소화 등으로 대응하는 식이다.
이마트(139480) 관계자는 “엽채류에선 침수 피해를 입은 지역 외 대체 산지의 물량을 확보해 대체할 계획”이라며 “스마트팜, 프레쉬센터 등을 활용해 공급 안정 노력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홈플러스는 “‘맛난이 농산물’을 일반 상품 대비 20~30%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며 “축산 물량의 수급 안정을 위해선 경기, 경상, 전라, 충청지역 등 산지를 다변화하는 중”이라고 전했다. 롯데마트 역시 “채소·과일과 비교해 맛과 영양에는 차이가 없지만 조금 작거나 외관에 흠이 있는 B+급 상품을 ‘상생 채소’, ‘상생 과일’이라는 이름으로 시세보다 저렴하게 판매 중”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전통시장 상인들은 뾰족한 돌파구가 없는 상황이다. 아현시장의 한 상인은 “물건이 싸고 좋아야 많이 팔텐데 지금은 너무 가격이 올라서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부담”이라며 “정부에서 좀 해결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농산물과 축산물 등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수요·공급 관리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며 “공급이 크게 부족한 품목은 수입 확대 준비를 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추석까지 밥상물가 고공행진이 이어져 소비자 불만이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