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대 선생은 1889년 9월 18일 황해도 해주에서 부친 한준상과 모친 문성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3년 부친을 따라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떠나 하와이에서 한인기숙학교와 중학과정인 밀스학교를 거쳐 1913년 7월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로웰고등학교 4학년으로 편입해 졸업했다.
고교 졸업 후 1916년 4월 대한인국민회 맨티카지방회를 설립하고 법무원에 선임돼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했다. 1917년 흥사단에 입단하했으며 다뉴바지방회 대의원 자격으로 1918년 1월에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의원회에 참석해 1918년 신규사업 10개조를 입안했다. 국어학교 설립 등 주로 민족교육을 강화하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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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1월에는 북미실업회사의 감찰원, 1924년경에는 다뉴바 한인국어학교 교장, 1931년 6월에는 태극학교 교감을 역임하며 민족교육을 위해 노력했다.
1925,6년 경 딜레노로 이사해 대한인국민회 딜레노지방회를 설립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특히 1935년부터 1938년까지 딜레노대의원 자격으로 대한인국민회 대의원회에 참가하면서 한인사회의 통일과 국민회 중심의 통합운동에 앞장섰다. 로스앤젤레스에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신축 시에는 건축준비위원으로 참여해 총회관 신축에 많은 역할을 했다.
1940년 이후 3년간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한국광복군 창설을 위한 후원금 모금과 지원활동, 해외한족대회 개최,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위한 외교활동 지원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1945년 4월에 개최된 샌프란시스코회의에 대비해 같은 해 4월 해외한족대회를 주도하고 단장으로 선임됐다. 선생은‘비망록’(Statement of Faith)을 작성해 미·영·중·소 연합국의 지원으로 ‘한국이 완전한 독립국이 될 것임을 믿으며, 한국민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태평양전쟁에서 최후 승리를 이루는 데에 앞장설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1945년 8월 광복 후 재미한족연합회대표단 제1진으로 11월 4일 귀국한 선생은 대표단 등과 함께 국내 각 정당과 단체 등의 장래 계획과 의견을 수렴하고 충칭에서 귀국한 임시정부 요인들과도 수차례의 회합을 갖고 ‘조선의 자주독립 촉성’이라는 건의안을 1945년 12월 미 군정청에 제출했다.
1946년 9월 초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중립적 입장에서 중간세력들과의 통합운동과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 활동을 지속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미국으로 돌아 온 이후에도 선생은 농장사업과 흥사단 활동에 전념하며 여생을 보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미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와 관련해 독립기념관에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별도의 전시코너를 마련하고 관련 자료를 2월 한 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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