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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박미애 기자] 비밀은 없다. 1주일 전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추문도, 10여년 전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의 성추문도 결국 드러났다. 성경의 말처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춰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미투(Me Too) 운동 한 달. 한 여검사의 고백으로 시작한 미투는 법조·문화·대학·체육·종교를 거쳐 이제 안희정 전 지사의 성추문 파문으로 정계까지 침투했다. 남북한의 역사적인 대화 국면마저 송두리째 삼켰다.
미투를 둘러싼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나도 당했다”는데 후자는 “사실이 아니다”거나 “기억에 없다”고 주장한다. 전자는 추행이고 폭행이라는데 후자는 격려고 연애라고 얘기한다. 미투의 대척점에 선 이들의 언어가 이렇게 다르다. 서로 다른 기억 때문이다.
가해의 기억은 흐릿한데 피해의 기억은 선명하다. “1993년 종로의 술집에서”(최영미) “10년도 전의 일이다”(김수희) “90년대 부산 ㄱ 소극장”(익명의 댓글) “2013년 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연극배우 송모씨) 수년, 십수년, 수십년 전의 일인데도 불과 며칠 전의 일인 것 같다. 기억을 둘러싼 공방에 대중도 혼란스럽다. 피해 사실을 털어놓는 여성들의 용기를 지지하면서도 ‘소설 아니냐’며 ‘오래 전의 일을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의심한다.
전문가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트라우마로 설명한다. 사람은 이제껏 없었던 끔찍한 사건(사고)을 당했을 때 신체적 고통과 함께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그때 몸에 새롭게 각인된 정보로 인해서 유사한 상황, 유사한 경험에서 불안감과 공포감을 느낀다. 심할 경우 공황장애 등 일상 생활도 어렵다. 성폭력이 이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것이 자신이 아는 사람, 믿는 사람, 존경하는 사람에게 당한 일이라면 더 큰 충격을 가한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는 “떨치려고 한다고 떨쳐지는 고통이 아니다.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없는 거다. 신체적 접촉 시 수치심, 불쾌감, 혐오 이런 감정이 계속해서 떠오르는데 어느 순간에는 ‘내가 잘못했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책, 후회, 분노의 감정들도 뒤섞인다. 피해자는 그 경험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다. 전문적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일생 생활이 불가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오래 전의 일도 그들에게는 현재진행형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피해자의 기억은 가해자의 그것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미투는 권력형 범죄라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냄과 동시에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드러냈다.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일이 중요하다.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치료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미투운동이 피해자들의 상처를 드러내는 데에만 머물러선 안된다”고 치료의 효과도 기대하면서 “그것을 위해서는 피해자들에 대한 지지와 배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