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도처에 `For Rent`.. 월가가 비어간다

전설리 기자I 2009.03.03 09:04:03

치솟는 공실률..곳곳에 `For Rent` 간판·현수막 넘쳐나
콧대높던 월가 임대료 `파격 할인`..4개월까지 공짜
`불패` 뉴욕 부동산 시장 `불황 몸살`..경매붐 속 반토막 속출

[뉴욕=이데일리 전설리특파원] "브로커를 거치지 않고 오셨다니까 제가 4개월까지 `공짜(free)`로 해드리겠습니다. 월 3000달러 넘는 집을 2000달러 정도에 사실 수 있는 셈이죠"

2000달러든 3000달러든 `한 달` 임대료로는 적지 않은 돈이다. 1500원을 넘긴 달러-원 환율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곳이 세계의 중심지 맨해튼의 월가(Wallstreet)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마천루만큼이나 높은 임대료로 콧대 높던 월가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를 지나 월가를 따라 늘어선 화려한 건물들의 입구와 벽면에는 `For Rent` `Now Renting` `Retail Space Available` 등 입주자를 찾는 간판과 현수막이 넘쳐난다. 한바탕 감원과 해고의 피바람이 휩쓸고 간 뒤 무수히 많은 인력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글로벌 금융위기 진원지의 현주소다.
 
치솟는 공실률 속에 임대료를 팍팍 에누리해 주는 것은 물론이다. 한 달, 두 달, 심지어 넉 달 임대료까지 무료로 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 뉴욕증권거래소(NYSE)를 지나 월가를 따라 늘어선 화려한 건물들의 입구와 벽면에 `For Rent` `Now Renting` `Retail Space Available` 등 입주자를 찾는 간판과 현수막이 넘쳐난다.
 
잘 차려입은 뉴요커로 가장하고 길을 나섰다. 먼저 찾은 곳은 월가 63번지. 자신을 `베스(Beth)`라고 소개한 백인 여직원이 친절하게 안내해줬다.

콘도(한국의 고층 아파트)를 직접 보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슬쩍 물었다. "요즈음 프로모션을 위한 할인 행사가 많다던데요?" 주저하지 않고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보여드리는 콘도는 지금 당장 들어가시면 2개월을 무료로 드립니다. 12개월 가격으로 14개월을 사실 수 있는 셈이죠. 한달 뒤 들어가시게 되면 1개월을 무료로 드립니다"

발코니가 딸린 원베드룸. 한달 임대료는 2995달러다. 2개월을 무료로 할 경우 12개월치 임대료를 14개월로 나누면 월 임대료는 2567달러로 낮아진다. 베스가 친절하게 계산한 가격을 적어서 내민다.

발코니를 통해 맨해튼 전망이 한눈에 보이는 콘도는 환상적이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가 친구들과 파티를 벌였던 옥상이 떠올랐다.

콘도를 나서면서 물었다. "이런 프로모션이 예전에도 있었나요?" "제가 업계에 들어온 후로는 처음입니다. 금융위기 때문에 경기가 나빠지면서 최근 프로모션이 크게 늘었습니다"

▲ 월가 콘도들의 전경. 치솟는 공실률 속에 임대료 할인은 물론 4개월까지 무료로 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등장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월가 95번지. 도어맨이 친절하게 문을 열어준다. 들어가는 로비부터 눈이 부시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세련된 조각품으로 장식된 은은한 조명이 깔린 라운지는 유럽풍 고급 살롱을 연상케 한다. 월가 부유 고객층을 타깃으로 지어진 콘도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월 2000달러대선의 스튜디오를 찾고 있습니다" "저희 수준의 콘도는 그 정도 가격으로는 어렵습니다만, 가격을 맞춰드리겠습니다. 브로커를 거치지 않고 오셨다니까 제가 4개월까지 `공짜(free)`로 해드리겠습니다. 월 3020달러의 집에서 2265달러에 사실 수 있는 셈이죠"

콘도를 둘러보는 동안 설명이 이어졌다. "저희 콘도는 인근에서도 가장 인기가 높은 편입니다. 새로 지은 뒤 처음으로 입주하게 되는 거라서요. 원래는 JP모간체이스 사무실이었는데 부동산 개발업자가 리모델링한 것입니다"

인기가 높다고? 공실률이 궁금했다. 지난 여름부터 입주가 시작됐는데도 아직 85%밖에 차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콘도 유닛은 물론이고 부대시설 또한 최고급 호텔 수준이다. 공용으로 이용되는 거실은 최신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거실에서 이어지는 발코니에서는 월가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어디서나 무선랜이 가능하다고. 심지어 매일 이곳에서 미국식 아침식사가 무료로 제공된다고 했다. 피트니스 센터에는 의학과 과학기술이 접목된 최신식 운동시설이 갖춰져 있었고, 요가 클래스도 무료로 제공된다고 했다. 24시간 도어맨과 드라이클리닝 발렛 서비스는 기본이다.

실제로 `불패`라 불리우던 뉴욕 부동산 시장이 불황에 전염되기 시작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 전역의 주택시장이 3년간 몸살을 앓아오는 동안에도 끄떡없던 뉴욕 주택 가격이 최근 월가의 붕괴와 더불어 가파른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심지어 일부 개발업자들은 럭셔리 콘도들을 경매에 내놓기 시작했다. 경매와는 좀처럼 거리가 멀었던 뉴욕 부동산 시장의 상황이 `확` 달라진 것이다. 경매 매물로 나온 주택 가격은 시장의 정점이었던 1년전 가격의 40~45% 수준. 맨해튼 최고 부유층이 거주하는 어퍼 이스트사이드(Upper East Side)의 2베드룸 콘도 가격은 1년전 220만달러에서 최근 110만달러로 반토막 났다.

월가의 몰락으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깨지면서 뉴욕 부동산 시장의 하강이 지속될 것으로 전문가들을 내다보고 있다. 이미 해고됐거나 해고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월가 펀드매니저들이 개발 단계에서 매입하기 위해 예치했던 보증금을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는 반면 재고는 그만큼 더 쌓여가고 있다. 현재 뉴욕시에는 8000개의 새로운 콘도들이 매물로 나와 있고, 내년말까지 2만2000개의 신규 물량이 추가로 공급될 예정이다.

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베스였다. 오늘 둘러본 콘도의 구조도와 임대료를 정리해서 보내주겠다면서 이메일 주소를 물었다. 인사를 마치고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그녀는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이 가격에 이런 집에서 살 수 있는 행운을 절대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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