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국극은 민중 속에서 우러나온 일종의 노래극이다. 판소리를 바탕으로 했지만 20세기 중반을 사는 사람들이 바라던 욕망과 재미와 꿈을 담았다. 기존 혼성 창극이 따라잡을 수 없는 사실이 있었고 시대를 앞서 가는 정신이 있었으며 희망을 불어넣는 이상이 있었기에 새 예술이 됐다. 요즘 말로 하면 ‘힙’한 신진 장르가 탄생했던 셈이다.
드라마에서 그려진 것처럼 관객의 환호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임춘앵(1923~1975)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중심으로 스러져가는 우리 풍류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여성들 손에서 신명 넘치게 펼쳐졌다. 모든 남녀 배역을 여성이 도맡아 하며 사회적인 성 정체성을 뛰어넘는 힘이 뿜어져 나왔다. 긴 세월 축적된 민족 미학과 문화유산의 전통 속에 기운생동하고 있었던 심미적 삶의 충동을 여성의 힘으로 되살려냈다.
실낱같은 여성국극의 명맥을 이어온 조영숙 국가무형유산 ‘발탈’ 예능 보유자는 2022년 펴낸 ‘여성국극의 뒤안길-동지사 시대에 관한 증언’에서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두 가지로 밝혔다. 첫째는 기왕의 창극, 즉 남녀 혼성 소리극과 비교해서 여성국극의 특징과 창의성이 여전히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왜곡과 오류가 심하기에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여성국극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하도록 당국에 촉구하기 위해서라 했다. ‘뒤안길’이라는 책 제목에 이 두 가지 시대적 염원이 녹아있다.
드라마 ‘정년이’는 여성국극 다시 보기와 재평가를 위한 실마리를 던졌다. 100화가 넘는 원작 웹툰도 좋았지만 그 방대한 서사를 12부 드라마 안에 녹여 넣은 김태리, 신예은, 정은채 등 배우의 호연은 여성국극 1세대와의 연대를 떠올리게 할 만큼 뜨거웠다. 김태리 배우는 이 드라마를 위해 3년 전부터 소리를 배웠고 목포 사투리를 연습했다. ‘정년이’는 이런 젊은 배우들의 노력 덕에 뒤안길에서 걸어 나온 여성국극의 21세기 신세대 판이다.
올해 구순이 된 조영숙 명인은 ‘정년이’가 다시 살려놓은 여성국극의 미래를 위해 남은 여성국극인들이 하나로 단결해 공연을 활성화하자고 말한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 상주 단체로 둥지를 튼 ‘여성국극제작소’는 이런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 단체로 조 명인의 제자인 박수빈과 황지영이 만든 ‘레전드 춘향전’, ‘화인뎐’은 입소문을 타고 관객을 불러 모았다. 세종문화회관 기획 공연 ‘조도깨비 영숙’이 제11회 이데일리 문화대상 국악 부문 수상작이 된 것도 큰 힘이 됐다. 내년 1월 대학로 무대에 오르는 아르코 창작산실 선정작 ‘벼개가 된 사나히’와 개봉 예정인 조영숙 명인 다큐멘터리 등이 여성국극 재발견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관심사다.
서연호 고려대 명예교수는 조영숙 명인에게 생생한 체험담을 기록하는 일이 역사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라며 책 쓰기를 권유한 전통 연희 전문가다. 서 명예교수는 이 시점에서 여성국극의 형식을 응용한 현대 작품이 창작돼야 한다고 조언한다. 동시대성 없이 과거의 명성이나 흘러간 옛것에 대한 향수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통은 전해서 통해야 문화유산으로 살아 숨 쉰다. 이제 여성국극은 탄생 100년을 바라보며 회생했다. 두 손 모아 염원한다. 여성국극이여, 다시 날아올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