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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설날은 ‘낯설다’의 어근인 ‘설’을 따 이름을 지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낯설게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복을 함께 비는 명절이다. 단오 또한 풍년을 비는 단오제와 단오굿을 가장 중요한 행사로 치는 날이다. 새해의 복을 기원하고 모내기 후 풍작을 비는 날이 명절이 된 것은 예측 불가능한 불행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모여 이겨내고자 했던 ‘극복의 의식’이었다. 추석은 조금 다르다. 왕실보다 민간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로 삼았다는 추석은 한해 농사의 결실을 서로 나누며 먹거리를 즐기고 그 흥을 다양한 민속놀이로 풀어내는 ‘축제의 의식’에 가까웠다.
추수를 끝낸 농민의 후련함, 집집마다 작물과 음식을 나누는 정, 농사는 잠시 잊고 모두 모여 즐기는 놀이들. 요즈음 추석 오히려 한산해진 도심. 멀지 않은 과거의 추석에 이 도심을 채웠던 건축과 공간을 눈을 감고 마음 속으로 걸어 보게 된다.
여기저기 노랫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골목을 걷는다. 활짝 열린 대문 틈, 마당 평상에서 먹거리를 다듬는 이웃의 모습이 보이고 몇 발짝 더 걸으면 어깨높이의 담장 너머 낯익은 그 집 아이들의 놀이가 눈에 들어온다. 전통가옥의 담장은 시선은 허락하되 신체는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장치로 자리했다. 대문은 열려 있으니 편안한 시선이 허락된다. 마당과 맞닿아 있는 작은 대청에서는 송편 빚기가 한창이다. 이 집의 떡 맛은 선명히 보이는 빛깔만 봐도 짐작이 된다. 대청 옆 문 살 너머에선 어르신들이 덕담을 나누는 모양이다. 덧발린 한지에 은은히 투과된 목소리가 따뜻한데 비친 그림자까지만 보여주니 엿들어선 안될 것 같다. 두세 집 지나치면 골목들이 만나는 공터에는 씨름판이 벌어졌다. 마당에서 나물 다듬는 어머니도 귀만 쫑긋 세우면 누가 이겼는지 알듯하다.
상상 속 마을, 옛 집들 사이를 누비고 나면 우리 전통 건축의 성격이 짐작이 된다. 우리 옛 건축은 ‘나와 동네가 관계맺는 방법’, 조금 차갑게 말하자면 ‘인간과 도시 사이의 커뮤니케이터’ 역할을 한다.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 질 수 있는 최소한의 건축적 장치들인 셈인데, 나눔의 명절에 참 어울리는 공간이다.
다시 눈을 뜨니 지금의 우리 도시가 보인다. 공간은 사라졌는데 의식은 남아있다. 조금 멀리 떨어져 사는 우리는 명절이 되면 부모님을 찾아뵙는다. 꽉 막힌 도로를 달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면 폭 6m의 구석진 길이 지하주차장으로 연결된다. 음습한 지하주차장에서 부모님 댁 동 번호를 찾아 헤매는 과정을 거쳐 유리문을 밀고 어둑어둑한 홀에 들어서자 머리 위로 약한 센서등이 켜진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찾아 누르고 나면 이젠 익숙해진 적막의 시간이 흐른다. 기계에 몸을 맡기고 잠시간 붕 뜬 기분을 느끼고 나면 부모님 댁 현관문 앞에 뱉어진다. 옆집에 분명 사람이 살고 있겠지만 지하주차장과 다를 바 없는 적막이 흐른다. 서둘러 초인종을 누르니 이제사 반가운 부모님, 맛있는 명절 음식이 보인다. 다만 우리 가족만의 축제다. 명절 풍경은 항상 켜져 있는 TV가 전하고 아마 윗집도, 아랫집도, 그 아랫집과 또 그 아랫집도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전통의 공간이 사라져 버린 것은 역사의 큰 아픔 중 하나다. 우리의 역사와 전통은 깊고 풍부한데 그 공간적 바탕인 건축과 도시는 질곡의 근대사를 겪으며 너무 빨리 바뀌어 버렸다. 추석이라는 어울림의 전통은 공간의 상실로 인해 고립된 의식으로 남았다. ‘나눔은 사라지고 의무만 남았다’고 말한다면 가혹한 것일까. 내밀해 지고 단절돼 버린 우리의 거주형태는 더이상 나눔의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다.
집이라는 거주공간의 역할은 의식주 해결만이 전부가 아니다. 건축은 삶을 위한 기계이기도 하지만 행위를 담고 관계를 맺어주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갈등도, 화목도 모두 공간에서 벌어지고 은폐하고 곪게 하느냐, 열어주고 소통하느냐 역시 공간의 영향을 받는다. 상상 속 옛 마을에서 찾을 수 있었던 어울림의 공간을 떠올려보면 다음 세대가 누려야 할 도시공간은 어떠해야 할지 명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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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現) Architects H2L 대표
- 현 중앙대학교 건축학부 겸임교수
- 건축사/건축학박사/미국 친환경기술사(LEED A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