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작가 이디스 워튼의 소설 ‘순수의 시대’에 나오는 대사이다. 뉴욕 사교계 인사들이 여자 주인공의 결혼생활을 둘러싼 추문에 대해 떠들자 이를 듣고 있던 남자 주인공은 남편이 아닌 아내에 대해서만 비난이 쏟아지는 부당함에 항의를 한다. 이 때 험담을 늘어놓던 사람은 어이없다는 듯이 남자 주인공에게 여자에게 남자와 똑같은 자유가 있냐며 반문을 한다.
소설은 이렇듯 당시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사회적 관습과 억압, 위선적인 잣대를 꼬집는다. 이지스 워튼이 ‘순수의 시대’를 발표한 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0년이고, 소설의 배경은 그보다도 이전인 1870년대이다.
그런데 벽화 ‘쥴리의 남자들’을 보면 2021년 현재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1870년대의 그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배우자 김건희씨를 비방하는 벽화의 내용은 논문 표절 의혹도 주가조작 의혹도 아닌 과거 연애 관계를 비난하는 내용이다. 이를 두고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대선 후보로 나선 마당에 공인이 된 배우자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정치적 표현의 자유라고 옹호하는 의견도 있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널리 인정되어야 하고, 대선 후보로서의 능력이나 그를 둘러싼 의혹에 대한 철저한 검증은 오히려 장려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의혹의 대상이 왜 과거의 ‘남성 편력’ 문제여야 하냐는 것이다. 심지어 후보 본인도 아닌 배우자의 연애 문제가 의혹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벽화의 내용은 윤 전 총장의 대선 후보로서의 능력이나 자질과도 관련이 없고, 그 가족을 둘러싼 비리나 부패 문제를 비꼬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김씨의 사업체나 그의 모친을 둘러싼 의혹을 제기했다면 정당한 정치적 비판이나 풍자라고 볼 수 있었겠지만 벽화의 내용은 오로지 김씨를 ‘조신하지 않은 여자’로 낙인찍고 조롱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번 논란은 사실인지 아닌지, 윤 전 총장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지 반대하는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여성에 대해 여전히 갖고 있는 사회적 편견과 억압을 되짚어 보아야 하는 문제이다.
서점의 주인은 벽화에 대해서 정치적 의도가 없는 단순한 ‘풍자’였다고 해명했다. 그의 말대로 그의 의도는 한바탕 웃고 말자는 풍자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여성의 과거 이야기가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는 풍자의 대상으로 먹힌다는 사실에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여성에게 전형적인 ‘참한 여성’을 강요하고 그렇지 않은 여성은 비난받아야 하는 존재로 보는 시각이 깔려있다. 재미와 웃음도 사회적으로 합의된 맥락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신하지 않은 여자’라는 말은 써도 ‘조신하지 않은 남자’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지금 벽화를 비난하는 목소리들은 여성의 과거에 성적 프레임을 씌우고 조롱하는 사회적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지 벽화 자체의 선정성을 꼬집거나 사실 여부를 가리자는게 아니다. 그럼에도 사실이 아니면 됐지 않느냐, 풍자에 왜 이리 예민하게 반응하냐는 의견은 그 자체로 여성에 대한 편견이 너무도 오랫동안 견고히 자리 잡아 그 문제점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젠더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성차별을 없애고 양성 평등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법과 제도를 고치고 강압적인 처벌을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제 아무리 좋은 법과 제도가 만들어져도 “여자에게도 남자와 똑같은 자유가 있는 것 같나?”는 1870년대의 인식이 계속 되는 한 젠더 갈등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번 벽화 논란처럼 은연중에 내재화된 여성에 대한 편견을 별거 아닌 일로 치부하지 않고 민감하게 인식하는 움직임이 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