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11월의 바다가 그러하듯 이곳 역시 자연이 움직이는 소리만 들립니다. 기세를 잃은 파도와 생기 없는 바닷새, 죽어가는 바람이 만들어 내는 소리는 침묵보다 고요해서 오히려 귀가 먹먹할 지경입니다.
온통 잿빛입니다. 짙은 구름에 색이 바랜 햇빛이 한 장의 흑백 사진을 만들어 냅니다. 옷깃을 여미듯 마음을 추스려 봅니다. 고해성사와 같은 독백을 토해 봅니다. 순례의 길을 걸어봅니다. 그러자 절대 고독의 시간이 열립니다.
해변의 카프카가 결코 부럽지 않습니다. 여기는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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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와 달, 그리고 지구의 운행에 걸음을 맞추다
저마다 키가 족히 30m는 넘을 것 같은 소나무 숲길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면 바다가 나타납니다. 방심하는 사이 눈앞에 펼쳐진 바다가 놀랍습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토끼굴에 빠진 기분이랄까. 송림의 장막에 가려진 삼봉해변은 그렇게 갑작스레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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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오니 영화 ‘녹킹 온 해븐스 도어(Knocking on heaven’s door)’의 시한부 인생 두 사내가 생의 마지막 순간 바다를 마주하는 심정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들이 눈을 감기 전에 보았던 철지난 바닷가의 쓸쓸한 풍경을 여기서 봅니다.
안면도 백사장항에서 시작된 노을길은 여기 삼봉해변을 지나 꽃지해변까지 이어지는 12km의 짧지 않은 길입니다. 중간에 기지포, 안면, 두여, 밧개, 두에기, 방포 등 8개의 해수욕장을 거느린 길입니다.
그래서 노을길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솔잎이 수북한 푹신한 흙길도 있지만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언덕과 비탈진 산길, 성가신 자갈길을 만나게 되는 길입니다. 그러니 걷다가 힘들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도 상관없습니다.
날씨만 좋다면 노을길 어느 곳에서도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으니까요. 노을길은 우리나라 3대 낙조 장소로 꼽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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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사실은 꽃지해변을 향해 걷다보면 항상 오른편에 바다와 해를 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오후에 노을길을 걷는다면 곧 있으면 바다로 들어갈 해와 함께 걷는 것입니다. 해는 지구의 자전속도에 맞춰 어깨동무처럼 당신을 따라옵니다.
노을길에서는 바다의 들고 남에 따라 갯벌의 크고 작음이 펼쳐지는 풍경도 보게 됩니다. 달의 힘입니다. 말하자면 노을길 걷기는 해와 달과 지구의 운행에 보폭을 맞추는 일입니다. 그러니 홀로 걸어도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 절대고독의 시간이 열리다
이런 공간에서는 오감이 예민해지기 마련이니 혹시라도 귀를 귀울이면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해가 만들어 내는 소리를. 째깍째깍 시계바늘처럼 부지런히 당신을 쫓아오는 소리를. 그 소리는 철지난 바닷가에서 나는 가장 큰 소리입니다.
오감이 열리면 생각도 깊어집니다. 다른 곳에 두고 온,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지금 만약 당신이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다면 노을길을 걸어보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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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더 이상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상실감의 무게추는 무거워질 것입니다. 축제가 끝난 이 공허한 바닷가에서 상실감은 심연으로 한없이 가라앉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가, 바닥까지 다다랐을 때가 기회입니다. 이제서야 비로소 상실감과 연결된 그 끈을 잘라야 할 때가 왔음을 당신은 알게 됩니다. 생각의 끝에서, 이 길의 끝에서 상실감과 단호한 절연을 할 것입니다. 무거운 것은 더 무거운 것으로 상쇄됩니다. 카타르시스.
노을길 종착점인 꽃지해변에서 바라보는 붉은 노을은 그런 당신을 위한 선물입니다. 마침내 상실감을 떨쳐버리고 바라보는 노을은 당신을 어제와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지 모릅니다. 그럼으로 해서 당신과 철지난 바닷가의 풍경화는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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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태안에는 노을길 외에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모래언덕을 볼 수 있는 바라길 1구간(학암포~신두리, 14km)과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지정된 천리포수목원이 있는 바라길 2구간(신두리~만리포, 14km), 뱃길로 이동하는 유람길(만리포~몽산포, 38km), 가벼운 산책을 즐기는 솔모랫길(몽산포~드르니항, 13km)이 있습니다.
내년이면 꽃지해변에서 영목항으로 이어지는 샛별바람길(29km)도 열립니다. 그리워하지만 말고 찾아가서 쉬엄쉬엄 걸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