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호주로 이주한 26세 일본인 마나 하야시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호주에 있는 일본식 바, 스시레스토랑,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한 달에 약 2800달러(약 373만원)를 벌었다. 일본의 한 병원에서 정규직 영양사로 일하며 벌어들인 수입의 두 배”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러면서 “호주 장기 비자를 취득할 수만 있다면 계속 머물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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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화가치가 하락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해외로 떠나는 일본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다. 같은 시간 동안 같은 일을 하더라도 해외에선 두 배의 돈을 벌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어서다. 일본 유학 에이전트들은 ‘유학과 돈벌이를 동시에’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청년들의 해외 취업 프로그램을 적극 홍보하고 있다.
◇ 엔화 가치 10개월 만 또 최저…“日 임금에 대한 기대 없어”
일본의 유학 및 취업 사이트인 리-어브로드에 따르면 지난 7월 해외 구직 및 취업 상담 요청 건수는 1년 전보다 세 배 이상 급증했다. 구직사이트 인디드는 일본에서 ‘해외 구직’ 검색은 올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해외 취업 국가 중 한 곳인 호주에는 ‘워킹홀리데이 비자’ 방문자가 올해 상반기에만 1만 4398명이 몰렸다. 지난해(5270명)와 비교하면 거의 세 배 가량 증가한 규모다.
이처럼 일본에서 해외 취업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유는 ‘엔저’ 때문이다. 최근 달러화 대비 일본 엔화 가치가 10개월 만에 최저인 달러당 148엔에 근접한 수준까지 떨어져 연중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엔화의 실질 구매력도 약화했다. 일본은행(BOJ)에 따르면 엔화의 종합 구매력을 나타내는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1970년 9월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수입물가가 오르고 이는 다시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일본의 실질임금은 15개월 연속 하락 추세다. 즉 현재 받는 월급으론 생활 형편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의미다. 이에 일본의 청년들은 임금 상승에 대한 기대를 꺾고 ‘해외 노동자’를 자처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에 따르면 2021년 일본 가계의 중위소득은 약 2만 9000달러(약 3868만원)로, 미국(7만 784달러·약 9427만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평균 연봉도 3만 9700달러(약 5286만원)로 OECD 평균 5만 1600달러(약 6873만원)를 크게 밑돈다. 지난 3월 기준 일본 대학 졸업자의 월급은 평균 22만엔(약 198만원)에 그친다.
WSJ은 “일본의 엔화가치가 3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고 경기침체까지 겹치면서 많은 일본 젊은이들이 해외로 가는 것이 수익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짚었다. 직업 컨설턴트인 히라와타리 준이치도 “점점 더 많은 청년들이 ‘더 강한 통화’로 돈을 버는데 관심을 보이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 미래 비관하는 日 청년…“일터로서 매력도 떨어져”
일본에서의 미래를 암울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늘었다. 사회혁신허브 일본재단의 ‘미래 전망’ 설문조사 결과 일본 청년 중 14%만이 국가의 미래가 ‘더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미국, 중국, 영국, 한국, 인도 등 전체 조사대상 6개국 가운데 최저 비율이다.
오사카에서 은행직을 그만두고 미국 기술 회사에 취직해 외화로 돈을 벌고 있는 42세 한 일본 여성은 “달러로 표시된 급여를 받는데 일본 정규직으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벌고 있다”며 “일본 경제가 약화할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1년 전 호주로 이주한 일본인 오치아이 유리도 “더 이상 도쿄의 ‘비참한 수입의 웨이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고령화 및 인구감소가 진행되는 가운데 청년 노동 계층마저 해외로 떠나는 사례가 늘어나자, 일본에선 동남아시아 이주 노동자를 비롯해 경제활동인구 확충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엔저가 해외 노동자 유치에도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어서다. 도쿄 히토쓰바시대학의 노구치 유키오 명예교수는 “일본은 일하기 좋은 곳으로서의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WSJ는 “일본이 동남아시아 이주 노동자를 데려오는 경쟁에서 한국, 대만 등 이웃 국가들에게 뒤처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