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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에 뜨거운 전류가 흐르는 듯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잃었던 조국, 죽었던 조국의 얼굴을 대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탄압과 감시의 눈을 피해 태극기가 살아 있듯 조선 민족도 살아 있다는 확신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안중근 의사의 뜻을 받들어 항일 운동을 이어간 20여 명의 가족들 일생이 그렇듯, 안봉근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뒤 일제가 그 일가붙이들을 집요하게 감시한 탓이다. 독일로 망명한 뒤 이름을 중국식인 한봉근(Fonken Han)으로 바꾼 안봉근은 1930년부터 5년 여 드레스덴 민속박물관에서 근무하며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는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2021년 4월 유럽 공공박물관 안에 처음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돼 주목받았던 바로 그 박물관이다.
지난달 중순, 독일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미술사학자인 김영자 박사가 드레스덴 민속박물관 수장고에서 안봉근이 기증한 한국 유물 16점을 찾았다는 보고였다. 안봉근은 한국의 농기구를 직접 만들어 전시하고 열람 카드와 해설 자료를 쓰는 등 한국문화교육에 열성이었다는 것이다. 이 박물관의 동양유물 컬렉션 담당자인 페트라 마르틴 학예연구사는 앞으로 안봉근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바로 연락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한국사 발굴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된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고 한다.
김훈 작가는 장편소설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와 그의 동지였던 우덕순이 품었던 ‘청춘의 언어’를 이렇게 요약했다. “이 청년들의 청춘은 그다음 단계에서의 완성을 도모하는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에너지로 폭발했다.” 안봉근이 독일에서 열심이었던 모든 일은 이 안중근의 ‘청춘의 언어’에서 힘을 얻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는 지난달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 113주년을 맞아 미공개 유묵 한 점을 공개했다. 안 의사가 1910년 2월 18일 여순 감옥에서 쓴 글씨다. ‘동양평화 만세 만만세’란 글귀가 해서와 초서체로 담겼다.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나흘 뒤, 그는 자신이 품었던 ‘동양평화론’을 유서처럼 썼다. 이것이야말로 ‘청춘의 언어’가 아닐까.
지금 서울 이태원로 리움미술관 다목적실에 가면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볼 수 있다. ‘초월-과거와 현재, 국경을 넘어 만나다’는 퇴락하고 손상됐던 안 의사의 유묵을 보존처리해 선보이는 전시다. ‘지사인인 살신성인(志士仁人 殺身成仁)’ ‘천당지복 영원지락(天堂之福 永遠之樂)’ 두 점이다. 이 앞에 서면 딱 한마디가 떠오른다. 서심화야(書心畵也), 글씨는 그 사람의 마음을 그려놓은 것이란 뜻이다.
며칠 전 중국을 방문한 마잉주 전 대만 총통이 난징대학살(남경대학살) 피해자 추념 시설을 찾아 남겼다는 글씨 또한 서심화야의 경지다. 마 전 총통은 난징대학살 희생동포추념관의 방명록에 ‘역사절불가유망(歷史絶不可遺忘)’이라 썼다. ‘역사를 절대 잊지 말아야한다’는 글귀는 1937년 중일전쟁 중 일본군이 국민당의 수도였던 난징 시에서 중국인을 수십만 명 학살한 사건을 뼈저리게 되새긴 것이다.
중국에 난징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간토가 있다. 올해는 간토대지진(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100주년이다. 상해임시정부가 1923년 12월 5일 ‘독립신문’에 발표한 재일조선인학살 희생자 수는 6661명이었다. 하지만 일본 초등학교에서 내년부터 사용할 3~6학년 사회 교과서는 간토대지진 때 벌어진 일본인의 조선인 학살 내용을 삭제해 버렸다.
김훈 작가는 “‘동양평화’를 절규하는 안중근의 총성은 지금의 동양에서 더욱 절박하게 울린다”고 했다. 동양평화를 염원했던 안중근 의사의 큰 뜻은 지금도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에너지로 우리를 뒤흔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