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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이데일리 박진환 기자]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역사와 기억하고 있는 역사는 다르다. 특히 일제 강점기 시절의 역사는 일본과 친일 세력, 정치적 이해관계 등이 맞물리면서 진실이 아닌 의도적으로 왜곡되거나 가공된 거짓이 비일비재하다. 윤봉길 의사도 이 같은 맥락에서 잘못 알려진 내용들이 적지 않다.
이태복(69) 매헌윤봉길월진회 회장은 “지금까지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에 던진 것은 도시락 폭탄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면서 “1932년 4월 29일 일본의 전승축하기념식장에서 첫번째 던진 것은 물통 폭탄이며, 두번째로 도시락 폭탄을 던지기 전에 일본군에 잡히면서 2차 시도는 불발된 것이 역사적 진실”이라고 밝혔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으로 7년4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김대중정부에서 청와대 복지노동수석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 이 회장은 최근 윤 의사의 삶을 정리한 ‘윤봉길 평전’을 냈다.
이 회장은 18일 충남 아산 도고의 켄싱턴리조트에서 가진 이데일리와 인터뷰에서 “윤봉길 의사는 강의(剛毅)한 사랑을 실천한 분이다. 강의한 사랑의 길은 의지가 굳세고 강직하며 굽힘이 없는 사랑의 길이자 목숨을 바쳐 살신성인하겠다는 윤 의사의 비장한 결의였다”고 말했다.
윤 의사가 살아온 행적에 대해서도 이 회장은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직도 대부분의 국민들은 윤 의사가 백범 김구 선생의 지시에 의해 중국 상하이에서 폭탄을 던진 분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윤 의사는 상해 거사를 하기 전에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서 월진회(月進會)를 만들어 애국 계몽운동과 민족교육을 실천했던 분으로 이러한 업적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의사는 1930년 3월 6일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는 글을 남기고, 고향 덕산을 떠나 신의주를 거쳐 단둥으로 다시 칭다오를 거쳐 상하이로 갔다.
상하이에서 윤 의사의 마지막 행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국무령을 만나 조국 독립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뜻을 전한 것이었다.
이 회장은 “윤 의사는 고향인 덕산에서 전체 49가구 중 40가구의 문맹을 깨우치는 등 애국 계몽운동을 실천했던 분으로 23세때 중국으로 망명한 뒤 안중근 의사의 둘째 동생인 안공근 선생 등 여러 젊은 동지들과 같이 거사를 모의했다”면서 “당시 윤 의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김구가 아닌 안창호 선생이었다”고 설명했다.
윤 의사의 상하이 의거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당시 일본은 중국의 한복판인 상하이에서 3만명의 교민들과 함께 일왕의 생일 축제를 진행했다. 그러나 윤 의사의 의거로 일본군 핵심 지도부 7명이 죽었고, 그 결과 일본군은 중국과 휴전을 선언하게 된다”며 “이 일로 중국인들이 일본에 격분하게 되고, 중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다시 생각하게 했고, 카이로 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적시하게 한 중요한 요인이 됐다. 이는 몇개 사단이 하지 못한 일을 윤 의사 홀로 한 기념비적인 사안으로 역사가 재평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윤 의사는 거사를 앞두고 ‘자신을 역사의 제단에 바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아직도 윤 의사가 고향인 덕산에서 실천한 다양한 사회운동은 다 덮혀지고, 김구의 지시에 따른 테러리스트 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탄식했다.
이 회장은 “현재의 대한민국도 여러 난제에 부딪혀 있다. 한국사회가 고속성장을 하다가 경제와 일자리, 노동, 복지, 보건, 환경 등 모든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목숨을 걸고 이를 해결할려는 관료, 정치인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전제한 뒤 “한국이 이를 벗어나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부정부패 척결 및 사회혁신, 행정체계 개편 등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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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충남 예산군은 오는 27~29일 예산군 덕산면 충의사 일원에서 ‘제46회 윤봉길평화축제’를 개최한다.
이 축제는 윤봉길 의사를 테마로 한 역사인물형 축제로 4·29 상해 의거 87주년을 기념하는 동시에 윤 의사의 독립 활동은 물론 농촌계몽운동과 문인활동 등 다양한 업적을 재조명하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