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도쿄서 1000여명 모여 "美대선은 조작"
4·15 총선 조작됐다는 한국 ''태극기 부대''와 유사
日작가 "아베 잃은 상실감, 트럼프에 매달리는 것"
| 지난 6일 도쿄에서 열린 ‘미 대선은 조작’ 시위 (사진=아사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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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언론의 거짓말에 넘어가지 마라. 미 대통령 선거 결과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미국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에서 벌어진 일도 아니다. 최근 일본 도쿄에서는 10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미 대통령 선거가 조작됐다고 주장하며 이같이 외쳤다. 집회 주최 측은 신흥 종교단체이지만 인터넷을 보고 찾아온 비(非)신도들도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외친 구호는 다음과 같다. “이건 이미 대통령 선거가 아닌 선과 악의 싸움이다”
| 지난 6일 미 의회 난입사태 당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든 시위대의 모습이 포착됐다(사진=N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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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큐어넌, 한국에 태극기 부대가 있다면 일본에는 ‘트럼프 신자(信者)’가 있다. 큐어넌은 트럼프를 숭배하고 트럼프는 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태극기 부대는 지난 4·15 총선에서 개표부정이 있었다는 주장의 연장선상에서 미 대선도 조작됐다고 본다. 그렇다면 일본의 트럼프 신자들이 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뭘까. 정치평론가이자 작가인 후루야 쓰네히라는 일본 잡지사 프레지던트에 “미 대선 두 달 전 붕괴한 아베 신조 정권을 향한 상실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후루야는 일본 내 트럼프 신자들을 향해 “한심하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아베 신조라는 정신적 지주를 잃은 일본의 넷우익들이 다른 나라의 전 대통령 트럼프에 매달린다는 것이다. 그는 “넷우익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며 “그걸 구현한 게 트럼프”라고 말했다. 아베 정권을 계승하겠다고 한 스가 요시히데 총리가 극우 사상과는 거리를 두는 모습에 넷우익의 불만이 쌓였고, 모든 기대를 트럼프에 위탁한 결과 일본 내 트럼프 신자들이 생겨났다는 게 후루야의 분석이다.
| 지난 2019년 5월 일본 지바현에서 함께 골프를 치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 아베 전 총리(사진=AF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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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무엇이 바다 건너 일본 넷우익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후루야는 트럼프의 강력한 ‘중국 때리기’가 넷우익의 반중정서를 자극했다고 봤다. 안 그래도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열도 문제로 중국에 대한 적개심이 높은 넷우익들이었다. 코로나19 사태는 결정타를 날렸다. 중국을 향한 정치적 비판을 삼간 아베와 달리 트럼프는 대놓고 ‘우한 폐렴’이라는 명칭을 썼다. 일본 넷우익 사이에선 ‘트럼프가 아베보다 낫다’는 인식이 퍼졌다.
이 와중에 영원할 것 같던 ‘아베 1강’ 독주체제가 막을 내렸다. 건강상 이유로 아베가 지난 9월 사퇴하면서다. 뒤를 이은 스가가 ‘아베 계승’을 외쳤지만 넷우익 성에는 안 찼다. 극우파 기대와 달리 강경발언을 쏟아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보수 정치인의 척도로 여겨지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5개월째 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스가가 이념적으로 무색에 가깝다는 불만이 쌓여오던 와중 미 대선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이 승리한 것. 일본에서의 트럼프 신자 탄생은 아베도, 트럼프도 떠난 상황에서 극우 지도자를 잃은 데 대한 현실부정인 셈이다.
| 지난해 11월 7일 바이든 당선이 확정됐다(사진=AF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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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선 트럼프 신자 현상이 뿌리 깊은 ‘일본 정신’이 소멸하고 있는 징후라는 분석도 나온다. 나카마사 마사키 가나자와 대학 법학부 교수는 아사히신문 계열 주간지 론자에 “모든 지식 분야에서 일본이 근원이 됐다는 ‘일본 이데올로기’가 소멸하고 있다”며 “그 징후가 트럼프 현상”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일본인 지도자나 상징을 거치지 않고 트럼프의 직접적인 신자가 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는 자신 또한 넷우익이자 혐한 책을 23권이나 냈지만 현재는 넷우익을 비판하는 등 ‘합리적 보수’를 표방하는 후루야. 그는 트럼프 신자 현상에 대해 이렇게 마무리했다.
“미 시민권도 없는 일본인이 미국 (전) 대통령을 지지하고 부정선거를 라고 지껄인다. 그 열정을 자국의 정치 비판에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