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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와 마주앉아 한 작곡가가 쓴 피아노 곡을 작곡 순서대로 듣는 일은 꽤 생경했다. 그건 꼭 한 사람의 생애사를 압축해서 듣는 느낌이었다. 첫 곡은 버르토크가 22세 무렵에 작곡한 ‘코슈트의 장송 행진곡’이었다. 초기작이었던 만큼 버르토크 특유의 타격감 넘치는 피아노 곡이라기보다는 작곡가 리스트의 전통이 깊게 배어 있는 곡이었다. 이어서 연주된 ‘네 개의 피아노곡’은 같은 해, 세 번째 곡이었던 ‘피아노 랩소디’는 이듬해에 쓰인 곡이었다. 20대 초반, 많은 영향 속에서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하는 젊은 작곡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공연이 중반에 가까워질수록 ‘알레그로 바르바로’ 등 귀에 익은 곡들도 들려왔고, 한 사람의 어투가 조금씩 더 명확해지는 과정도 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러 곡들을 지나, 마침내 버르토크의 역작인 ‘미크로코스모스’에 도달했다. 언제나 모든 곡이 빛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 꾸준한 흐름 속에 크고 작은 변화의 씨앗들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드러났다.
수많은 연주자가 그 피아노 앞을 오가며 버르토크의 역사를 되살리는 그 과정은 그야말로 집요했다. 조금은 맹목적으로 그의 음악사에 매달리는 것 같기도 했다. 관객으로서 공연을 보고 듣기에도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걸 실현함으로써만 확인할 수 있는 것도 분명 있었다. 그저 음악가가 보내온 시간을 뒤따르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음악에 대한 믿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극적인 큐레이션이나 음악보다 큰 주제 없이, 음악과 함께 긴 시간을 보내고, 음악을 공들여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꼈다.
이번 ‘줄라이 페스티벌’의 피날레 공연을 보며, 나는 이제껏 더하우스콘서트가 견지해온 태도가 이 공연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느꼈다. 더하우스콘서트는 예술가의집에서 촘촘한 주기로 공연을 개최하고 있고, 그것이 매번 빛나는 것은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변화의 씨앗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 그동안 축적된 경험을 양분삼아, 이번 피날레 공연처럼, 폭발적인 힘을 담은 공연을 만들어 그 누적된 힘을 발산하곤 한다. 더하우스콘서트는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했다. 이들의 생애사 속에서 지금이 어떤 시기인지 확언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난 ‘줄라이 페스티벌’의 피날레가 이들의 역사상 빛나는 한순간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