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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칼럼]독립운동까지 영향 미친 퇴계학

최은영 기자I 2018.03.21 05:00:00

안동 독립유공자 357명, 인구 1000만 서울과 비슷
바른 삶 인도하는 퇴계 정신, 시간 지나도 무뎌지지 않아

[김병일도산서원 원장·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유난히 추웠던 지난겨울, 충청지역의 한 방송국에서 경북 안동을 방문했다. ‘독립운동의 성지를 가다’라는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안동 곳곳을 취재하고 끝으로 도산서원으로 필자를 찾은 것이다. 취재진은 평소 안동의 인상에 대해 퇴계를 배출한 영남학파의 본산답게 뿌리 깊은 유교의 고장이어서 지금까지도 양반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는, 조금은 고리타분한 곳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안동지역의 독립운동이 밖으로 알려지고, 특히 지난해 광복절 기념식에서 이 지역 독립운동가의 거룩한 활동이 다시 조명되면서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들이 안동을 취재하면서 감동받은 독립운동가는 한둘이 아니었다. 500년 명문종가(임청각)의 종손인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은 나라를 잃자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팔고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고는 분연히 고향을 떠났다. 살을 에는 추운 겨울 일가족을 모두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에 일제는 종가 앞에 철길을 내어 집안의 정기마저 끊어버렸다. 아직도 임청각은 반 토막이 난 채로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낸 증손자가 지키고 있다.

‘파락호’로 널리 알려진 학봉종택 김용환 종손(1887-1946) 스토리도 기가 막히다. 그는 열 살의 어린 나이에 한말 영남의 대학자였던 조부 서산 김흥락 선생이 의병활동을 지원하다가 일본 순사에게 큰 봉변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아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종가 감시가 심해지자 독립자금을 의심 없이 마련하기 위해 미치광이 행세를 했다. 처자식도 속이며 노름판에 재산을 탕진하는 파락호를 자처한 것이다. 종가 재산을 모두 날린 것도 모자라 조상 신주를 세 번이나 저당 잡혔고 사돈댁에서 보낸 무남독녀 외동딸의 혼수 장롱 구입비까지 날렸다. 이 모든 돈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으로 보내졌음은 물론이다. 그러면서도 광복 이듬해 이를 알리자는 동지들의 제안에 ‘응당 할 일을 했을 뿐, 누구에게 알리려고 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가슴 뭉클한 진정한 선비의 모습이다.

당시 나라를 잃자 전국에서 70여 명이 자결하였는데, 안동에서만 10명이었다. 24일간 단식 끝에 순국한 지역의 큰 선비 향산 이만도 선생(1842-1910)이 대표적이다. 9년 후에는 며느리 김락 여사(1863-1929)가 기미만세운동에 앞장서다 체포된 후 강렬히 저항하였다. 일제는 밝은 날을 못 보게 하겠다며 인두로 눈을 지져 실명시켰다. 이런 이야기들을 고개 너머 마을에서 듣고 자란 한 젊은이는 훗날 민족저항시인이 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7번의 옥고를 치른 이육사(1904-1944)이다.

이 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인구 17만 명의 안동에 국가서훈 독립유공자가 357명이다. 인구 1000만의 서울과 비슷한 수치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취재진은 그것이 궁금해서 후손들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한결같이 ‘퇴계의 영향’이라고 하더란다. 400년 전 퇴계가 어떻게 최근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까? 그 이유가 궁금해 도산서원을 찾았던 것이다.

퇴계는 인간이 마땅히 가야하는 올바른 길을 평생 공부하고 또 그것을 실천하였다. 이런 그에 대한 존경심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퇴색되기는커녕 더 빛을 발하였다. 평시에는 도덕적인 삶을 이끌고 위기 시에는 공동체를 위해 행동하도록 인도하는 빛이다. 향산과 이육사는 퇴계의 후손이요, 파락호 독립투사는 퇴계 제자 가문의 종손이자 향산의 손녀사위다. 임청각의 주인을 비롯한 이 지역 독립운동가들은 퇴계가 밝힌 빛 아래서 살아가는 선비공동체의 구성원들이었던 것이다. 대화가 이에 이르자 취재진은 크게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바른 삶의 길을 인도하는 빛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무뎌지지 않는다는 이치를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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