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위기는 왜 터진 건가. 이 사단이 벌어진 건 고전경제학의 시조인 애덤 스미스(1723∼1790) 탓이다. 그가 평생 밥상을 차려준 어머니의 존재를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좋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자초지종은 이렇다. 우선 “저녁식사는 어떻게 식탁에 올라 올까”란 질문부터. 이것이 경제학의 근간을 이룬 핵심적인 질문이니깐. 시계를 빠르게 뒤로 돌려보자. ‘국부론’이 출간된 1776년이다. 책을 쓴 사람은 ‘보이지 않는 손’을 설파한 바로 그 스미스. 이 위대한 저서에서 그는 경제학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합당한가. 천만의 말씀이란다. 스웨덴 유력 일간지 편집주간 출신인 저자는 정작 스미스의 저녁밥상을 차린 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였다’는 주장을 편다. 평생 결혼도 하지 않은 그가 어머니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국부론’ 따윈 쓸 수도 없었을 거라고.
오늘날 경제가 이 지경이 된 화근도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스미스가 자기이익 추구 욕구로 돌아가는 사회를 생각하는 동안 어머니를 까맣게 잊은 게 문제였다는 것이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을 빠뜨린 결정적 실수였다는 얘기다.
저자가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 건 스미스의 ‘경제관’ 그 자체다. 그가 구상한 세상은 단 하나의 남성만이, 그들이 하는 일만이 의미를 갖는 ‘단선적인 경제’였다는 거다. 어머니가 한 일을 망각한 채 불완전한 경제학을 만들었고 그 관점이 여태껏 이어지며 성불평등, 경제적 불안정의 시초가 됐다는 논지다.
책은 스미스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주류경제학이 놓친 ‘나머지 절반’의 이야기다. 스미스가 말한 경제적 인간, 또 그가 놓친 ‘보이지 않는 여성’을 강변한 페미니스트의 역설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미국의 투자은행이 ‘리먼 브라더스’가 아니라 ‘리먼 시스터스’였다면 지금 우리의 형편이 어땠을까에 대한 통찰이다.
▲세상 무시한 명석한 수학모델이 무슨 소용?
스미스가 ‘국부론’을 쓸 당시.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을 일터에 내보내기 위해 그들의 부인, 어머니, 누이는 하루종일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이웃과 실랑이를 하고 눈물을 훔쳤다. 그런데 그는 왜 그걸 보지 못했나.
스미스의 관심은 오로지 자연가격에만 맞춰져 있었나 보다. 모든 재화는 고유의 자연가격을 향해 움직인다고 그는 확신했다. 다시 말해 설탕이든 소금이든 가격이 올랐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지만 항상 자연가격에 가까워지게 마련이란 거다. 효율적 시장가설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으로 돌아간다는 것. 우산이 많고 해가 쨍쨍하면 우산가격은 떨어지고, 우산 수가 적고 비가 많이 오면 우산가격은 올라가고. 아주 완벽한 수학이 아닌가.
그런데 어쩌나. 이미 오류를 품은 수학이다. 아무리 명석한 수학모델이어도 실제 세상을 무시한 가정을 전제로 했다면 말짱 ‘꽝’이라서다. 시장은 늘 옳은 가격을 내는 중립적인 기계가 아니니까. 억만장자 투자가인 조지 소로스는 한술 더 떴다. 현실은 되레 정반대라고. 시장은 가끔 틀리는 정도가 아니라 매번 틀린다고. 특히 금융시장에는 결함 있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드는데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게 바로 이 결함 있는 시각이니까. 저자는 그럼에도 시장의 자연균형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지 않았다고 탄식한다.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던 날조차도.
▲아차차! 여자를 빼먹었구나
저자가 볼 때 세상의 빈곤을 없애는 것이 경제학의 목적이라고 본 경제학자는 거의 없었단다. 부자와 빈자, 권력자와 아닌 자, 기업과 노동자,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경제학자들은 줄기차게 같은 편을 들어왔다. 그러곤 인종차별부터 사랑문제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모델을 적용하는 데 열을 올렸다. 정작 실제 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연구하는 데는 관심을 잃은 것이다. 그러니 갈수록 추상적으로 될 수밖에. 자유로운 경제적 인간? 그런 게 있기는 한 건가.
한 가지 더. 가사노동을 GDP에 포함하지 않는 경제학자의 논거도 보자.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 사회의 가사노동 양은 거의 동일하다고. 그러면서도 그들은 어처구니없는 농담의 현장을 저자에게 들키고 말았다. 남성이 자신의 가사도우미와 결혼하면 그 나라의 GDP가 감소하고 어머니를 양로원에 보내면 GDP가 상승한다나. 저자는 인구 절반의 노동력을 무시하면서 무슨 경제학이랍시고 떠드느냐며 반격을 가한다.
▲‘밥상 차린 페미니즘’ 봐야 위기 해결
모든 경우를 따져도 결론은 한 바구니에 모인다. 아무리 잘난 스미스라도 절반의 답을 찾은 데 불과하다고. 잘못 채워진 첫 단추가 어긋나고 또 어긋나 지금껏 이 모양이라고.
저자처럼 한번 따져보자. 세계 주식시장이 출렁이면 수백만명이 일자리를 잃는다. 실업자는 재정적자를 초래하고 정부는 슬픈 표정으로 노인복지예산을 삭감한다. 하지만 돌봐야 하는 노인 수는 그대로다. 당연히 줄어든 간호사의 노동강도는 세질 터. 종국에 간호사의 허리와 관절이 못 당해낼 거다. 다시 말해 금융카지노에서 눈 깜작할 사이의 가격변화에 거는 도박의 실수가 어느 간호사의 무릎상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소리다. 스미스나 금융계의 우두머리가 완전히 무시해온 그 무릎 말이다.
저자는 경제학이 화려한 포장을 씌우고 저지른 그간의 ‘만행’을 세세하게 들춰냈다. 하지만 험악한 표정으로 정색하며 끄집어낸 페미니즘이 아니다. 재기발랄하고 유머스럽다. 진지하지만 무겁지 않고 깊이가 있지만 지루하지 않다. 그렇게 잘 다듬은 칼 한자루 치켜들곤 이렇게 외친다. 현대경제학의 문제 해결은 ‘밥상을 차린 페미니즘’을 제대로 보는 데서 출발한다고. 어차피 다 드러났으니 이제 정신 차리란 얘기다. 이마저 놓치면 그 지겨운 위기타령을 10년이고 100년이고 계속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