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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ML의 역대급 실적을 견인한 것은 바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 중인 EUV 노광장비다. 노광장비는 반도체 원판(웨이퍼)에 빛을 가해 회로를 새기는 작업에 필요하다. 빛의 파장이 짧을수록 웨이퍼에 미세한 회로를 그릴 수 있는데, ASML의 장비는 기존 장비 193㎚(나노미터·10억 분의 1m)의 14분의 1 수준인 EUV를 쓰기 때문에 초미세 공정이 가능하다. EUV 장비 한 대당 1500억~2000억원으로 알려졌지만 수요 급증으로 3000억원에 육박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삼성전자와 TSMC 등 글로벌 파운드리의 초미세 공정 경쟁이 심화하면서 ASML은 진정한 ‘슈퍼 을’이 됐다. EUV는 10㎚ 이하 초미세 회로선폭 공정에서 핵심장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EUV 장비는 제조에 오랜 시간이 소요돼 한해 생산량이 30~40대에 불과할 정도로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다. 지난해 10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EUV 장비 확보를 위해 직접 ASML 본사를 방문해 주목받기도 했다.
ASML이 오래전부터 잘 나갔던 건 아니다. ASML은 1984년 네덜란드 전자업체 ‘필립스’와 반도체장비 제조업체 ‘ASM인터내셔널’의 합작벤처로 탄생했다. 필립스의 아인트호벤 공장 내 목재창고에 둥지를 틀었을 정도로 초기엔 별 볼 일 없었다. 하지만 EUV 독점 생산을 통해 니콘·캐논 등 쟁쟁한 경쟁 업체들을 압도적으로 따돌리며 ‘톱’으로 올라섰다.
ASML이 노광장비 선두주자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협력’을 중시하는 풍토 덕분이다. ASML의 EUV 노광장비 한 대에 들어가는 부품을 생산하는 협력사만 900개에 달할 정도로 광범위한 협력 생태계를 갖추고 있다. 대표 협력사는 독일 광학 업체인 칼자이스다. 칼자이스는 노광장비 내에 들어가는 반사거울을 만든다. ASML은 칼자이스와 함께 지난 2003년 기존에 없던 액침(이멀전) 방식 노광장비를 출시, 이후 캐논과 니콘을 뛰어넘어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벨기에 첨단연구센터 아이멕(IMEC)과도 웨이퍼 위에 반도체 회로 모양을 한 번에 찍어낼 수 있는 ‘싱글 패터닝’ 기술 등을 함께 개발했다. 아시아에선 교세라(KYOCERA), 마쓰이(MATSUI) 등 일본 기업이 ASML의 대표 협력사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의 수출 규제 이후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국산화와 발전에 집중하고 있지만 아직은 국내 반도체 장비업체들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태”라며 “ASML이 광범위한 협력을 통해 업계 선두주자로 올라섰듯, 한국 장비업체들도 국내외 업체들과의 협력 생태계를 구축해 ‘슈퍼 을’로 거듭날 수 있을 정도로 기술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