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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찾은 서울 강남구 개포동 개포시영 아파트(1970가구). 단지 한쪽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입주민들은 제법 선선해진 날씨에도 손으로 계속 부채질을 했다. 일부 입주민들은 한숨을 내쉬는가 하면 때때로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다.
이곳에서 만난 송씨(여·61)는 자신의 집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엘리베이터조차 없는 아파트 4층 문을 여니 머리가 닿을 정도로 내려앉은 지붕이 눈에 띄었다. 이날 아침에 청소했다는 화장실은 벽면 여기저기에 금이 갔고, 움푹 가라앉은 바닥 사이로 시멘트가 드러났다. 그는 “추석 직후 이주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경기도 하남에 전셋집을 계약하려고 했는데 미뤄야 할 판”이라며 “여기서 겨울 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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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포시영 입주민들에게 지난 10일은 중요한 날이었다. 서울시내 주요 재건축 아파트 이주시기를 결정하는 ‘서울시 주택정책심의위원회’가 열린 날이어서다. 입주민들은 지난해 6월부터 얘기돼온 이주 날짜가 다가오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날 열린 심의위원회에서 개포시영 아파트의 이주 시기는 4개월 미뤄진 내년 1월로 연기됐다. 낡은 집에서 떠나기만을 기다리던 입주민들에게는 적잖은 실망이었다.
개포시영 아파트 주택 재건축 정비사업 조합은 지난 5월 열린 조합원 총회에서 이 아파트의 재건축 관리처분계획안을 통과시켰다. 주민 공람을 거친 7월에는 강남구청에 재건축 관리처분계획 인가도 신청했다. 통상 한 달간의 인가 기간을 감안하면 9월에는 이주에 들어갈 것이란 이야기가 단지 안에 돌았다. 그러던 지난달 20일 서울시로부터 아파트 이주시기 조정을 위해 심의위원회에 참석하라는 통보가 전해졌고, 이주 계획은 넉 달 뒤로 미뤄졌다.
개포시영 아파트는 현재 180가구가 공가(빈 집) 상태다. 이달에도 76가구가 떠나는 등 올해까지 총 416가구가 전·월세 계약 만료로 이사할 예정이다. 이승희 개포시영 재건축 조합장은 “집을 계약하거나 세입자 전세금(주택형별 5000만~1억 1500만원)을 대출로 내준 입주민들의 항의가 계속되고 있다”며 “최소 재건축 관리처분계획 인가 전에라도 이주 시기에 대한 사전 협의를 거쳐야 했는데 지금의 결정은 납득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지난 4월 ‘강남4구 재건축 이주 특별관리대책’을 시행한 이후 개포시영과 강동구 고덕주공3단지 아파트의 이주시기(2개월)를 조정했다. 지난 2012년 서울시가 관련 조례를 개정한 후 이주 시기를 조정한 첫 사례다. 이제원 서울시 행정2부시장은 “강남 4구의 주택수급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주변지역 주택 부족과 전셋값 상승이 우려돼 내린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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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주 연기로 늘어날 사업비다. 개포시영 재건축 조합은 물가 상승률에 따른 평균 공사비와 은행 이자, 조합 운영비 등을 포함해 월 9억 4500만원의 추가비용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넉 달 기준으로 총 37억 8000만원(가구당 193만원)이 더 들어가는 셈이다. 여기에 단지 내 세입자가 대다수(90%)를 차지하는 단지 구조상 빈집이 된 월세와 관리비(넉달 기준 평균 200만원)까지 합치면 추가 금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반면 서울시는 주택정책심의위원회에서 늘어날 사업비 규모를 월 6억원(조합원당 월 28만원)씩 4개월간 24억원에 그칠 것으로 파악했다. 개포시영 입주민인 이모 씨(47)는 “서울시는 이주 연기에 따른 추가 분담금 상승 규모가 크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며 “분담금 상승분에 대한 구체적인 보상 기준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더욱이 내년 1월로 정해진 이주 시기도 확정적이진 않다. 인근 개포주공 3단지가 현재 진행중인 이주작업을 넉 달안에 마무리하지 못하면 개포시영 이주시기는 더 늦어질 수 있어서다. 이승희 조합장은 “이주가 넉 달이나 연기됐지만, 서울시로부터 내년 1월에는 이주해도 좋다는 확답을 듣지 못했다”며 “이주시기 확정을 묻는 공문을 발송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남수 신한금융투자 투자 자문부 팀장은 “시장 상황을 전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주 시기를 몇 달 연기한다고 근본적인 전·월세 난을 해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서울시가 재건축 아파트 가구 수 등에 국한된 이주 시기 조정에서 벗어나 각 지역과 주택 규모에 맞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