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호의 그림&스토리]<5>매화축제 못 가니 꽃이 왔다

오현주 기자I 2021.03.12 03:30:03

▲빼앗긴 일상에도 봄은…양기훈 '매화도 자수병풍'
'10폭 병풍' 4m 달한 화폭에 매화나무 두 그루만
춤추는 가지에 홍매·백매…한땀 한땀 수놓아 피워
무너지는 조선왕실 위로했듯…봄 앓이 달래라 해

양기훈의 ‘매화도 자수병풍’(1906). 비단에 크고 작은 매화 두 그루를 세우고 한 땀 한 땀 수를 놓아 10폭 병풍으로 완성했다. 직접 밑그림을 그리고 자수병풍 제작까지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장대한 화폭에 지조와 정절의 꽃 ‘매화’의 의미를 심고, 장식성과 서정성 둘 다를 잡았다. 400×247.3㎝,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옛 그림을 좋아하고 미술사를 공부하다 보니 사군자인 매란국죽(梅蘭菊竹) 그림을 자연스럽게 많이 접하게 됩니다. 사군자 모두 선비 그림의 소재로 훌륭합니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선비들의 감출 수 없는 낭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매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마다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다가왔음을 알아채는 방법이 있겠지만 남녘에 꽃망울을 터트린 매화 뉴스를 들을 때면 드디어 봄이 코앞에 왔음을 느낍니다. 하얗고 붉게 피어난 매화를 보면 춥고 힘들었던 겨울을 잘 견뎌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며, 어디선가 진짜 꽃향기가 퍼지는 듯해 코를 킁킁거리곤 합니다.

매화 감상은 그 어떤 꽃 감상보다도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오랜 추위를 견뎌낸 고담스러운 줄기와 수묵화 같은 가지의 휘어짐, 서로 거리를 두고 옹기종기 앉아 있는 희고 붉은 꽃 등을 보고 있자면 마치 ‘나도 군자가 된 듯한’ 기분입니다. 해마다 3월 초순, 눈호강을 시켰던 남녘의 매화축제도 올해는 코로나19로 열리지 않는다고 하니 그저 매화 그림으로 아쉬움을 달래볼 수밖에요.

조선시대 매화도는 오만원권 뒷면에 삽입된 어몽룡(1566∼?)의 ‘월매도’처럼 고결과 기개를 표현한 작품도 많이 있지만 작품 수가 가장 많은 19세기 이후는 군자의 내면보다 매화 그 자체의 아름다움에 더 주목해 그려졌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화가가 우봉 조희룡(1797∼1859)이고 고람 전기(1825∼1854)도 유명합니다. 그 외에도 많은 화가가 ‘매화’를 그렸습니다만 그중 궁중진상품이자 특이하게도 자수로 완성한 석연 양기훈(1843∼1911)의 ‘매화도 자수병풍’(梅花圖 刺繡屛風1906)이 손꼽힙니다.

◇왕궁에 진상한 가로길이 4m 10폭 병풍

작품은 비단 바탕에 수를 놓아 완성한 10폭 병풍입니다. 낱폭의 그림을 각각 따로 그린 병풍과 달리 10폭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해 가로길이가 4m나 되는 대작입니다. 이런 형식을 ‘연폭식 병풍도’라 하는데 크기에서 느끼는 장엄함이 낱폭식 병풍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화면의 중앙에서 뻗어 올라간 큰 매화나무는 줄기가 양옆으로 벌어지면서 좌측은 사선 아래로 우측은 그 반대 방향으로 뻗어 갑니다. 양손을 벌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추는 듯한 모습입니다. 양쪽 큰 줄기에서 나온 가지들은 줄기와 반대로 펼쳐져 올라가고 내려옵니다. 이는 춤꾼의 한삼(汗衫) 자락을 연상케 합니다.

큰 나무 왼쪽에는 작은 매화가 올라와 허전한 공간을 메웁니다. 나무는 구륵법처럼 테두리를 검은색으로 잡고 그 안은 갈색으로 채웠습니다. 줄기 가운데는 짙은 색의 실을 써서 명암을 나타냈고 꽃잎은 옅은 분홍 실로 수를 놓아 분홍빛 도는 백매를 표현했습니다. 큰 나무의 짙은 갈색과는 달리 작은 나무는 그보다 옅은 색을 내 약간 뒤로 물러난 듯한 깊이감을 줍니다. 사실 붓이 아닌 자수로 이런 효과를 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높은 완성도로 보아 작가가 얼마나 자수병풍 제작에 뛰어난 실력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한 그루씩 큰 매화나무와 작은 매화나무가 얽혀 있는 단순한 구도지만 화면 전체로 뻗은 가느다란 가지와 꽃봉오리들로 인해 매화 천지가 됐습니다. 궁중에 어울리는 화려하면서도 기품 있는 작품입니다.

양기훈의 ‘매화도 자수병풍’(1906) 디테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난 안주수를 사용했다. 최고의 자수로 이름이 높았던 안주수는 남자가 자수장을 맡고 남자들이 수를 놓았다.


◇밑그림뿐 아니라 자수 제작까지 지휘

마지막 폭에 쓴 제시를 한 번 볼까요. “옥으로 뼈를 이루고 얼음으로 뺨을 이루니 맑은 화장과 흰 자태는 많은 황금처럼 보배롭네/ 반산의 눈은 오경 무렵의 촛불이니 문장을 이끌어내고 호탕하게 술잔을 잡게 하네.” 낙관은 ‘광무십년병자동시월신양기훈 양기훈인’(光武十年丙子冬十月臣楊基薰 楊基薰印)으로, 1906년 10월에 제작한 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신양기훈’이란 표현으로 궁중에 진상했던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아무개’라고 적힌 작품을 ‘신자관(臣字款) 작품’이라고 하는데, 이는 왕에게 헌상할 때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이 자수병풍이 궁중진상품이지만 양기훈은 도화서 화원은 아니었습니다. 도화서는 1896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고 그후 궁중그림의 수요는 외부에서 구입하거나 제작을 의뢰해 사용했습니다. 양기훈은 평양에서 활동하던 양반 출신의 전문화가로 서울에 장승업이 있었다면 평양에는 양기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1905년 서울로 활동영역을 넓혔는데 이 시기에 궁중진상품을 여러 점 제작했습니다.

양기훈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언론인이던 오세창(1864∼1953)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이렇게 간략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는 차남, 호는 석연, 본관은 중화. 헌종 9년 계묘년(1843) 생으로 평양에 살았고 그림 잘 그리기로 이름났으니 갈대와 기러기에 뛰어났다.” 비록 이 짧은 기록이 당대 수묵화로 이름이 높았다고 일러주지만, 우린 ‘매화도’를 통해 그가 채색화에도 실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보통 조선의 자수도에는 자수장의 이름을 기록했는데, 이 작품에는 수본을 그린 양기훈의 인장이 찍혔다는 점입니다. 이는 양기훈이 단순 밑그림뿐 아니라 자수 제작까지 총지휘했기 때문일 겁니다. 작품은 평안남도 안주에서 생산한 안주수(安州繡)로 제작했는데 안주수는 주로 남자들이 수를 놓았고 고급 실을 사용해 최고의 자수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평양에서 활동하며 안주 자수공과 관계를 맺었을 양기훈이기에 이런 최고급 자수병풍을 만들 수 있었을 겁니다.

◇망국을 슬퍼하는 ‘민충정공 혈죽도’

‘매화도 자수병풍’을 제작한 이후 양기훈은 서울을 들썩이게 한 대나무 그림 한 점을 그립니다. 그 유명한 ‘민충정공 혈죽도’(閔忠正公 血竹圖·1906)입니다. 굵기가 가는 대나무 몇 그루가 전부인 그림입니다. 화려하고 장식성이 강한 작품을 해온 양기훈의 작품치고는 심심하지요. 그러나 이 그림은 단순한 대나무 그림이 아닙니다.

양기훈이 그린 ‘민충정공 혈죽도’(1906·종이에 채색). 현장에서 직접 보고 그렸다는 작품은 목각판으로 인쇄돼 ‘대한매일신보’ 1906년 7월 17일자에 실렸다. 12.4×54㎝, 고려대박물관 소장.


1905년 11월 17일 나라의 외교권과 자주권이 박탈되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주미전권공사와 유럽 각국 전권공사를 지낸 대한제국 대표 외교통 민영환이 고종황제에게 필사적으로 조약의 거부와 파기를 상소합니다. 그러나 조약을 되돌릴 수 없자 11월 30일 의관 이완식 집에서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합니다. 반년 후 민영환의 피묻은 군복과 칼을 보관하던 마루방에는 푸른 대나무 네 그루가 자라났습니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 많은 언론이 민영환의 녹죽(綠竹)을 정몽주의 선죽(善竹)과 견주며 그의 충절을 보도했습니다. 이 장면을 가장 처음 사진으로 보도했던 ‘대한매일신보’는 인쇄상태가 좋지 않자 양기훈에게 부탁해 대나무 그림을 그리게 한 후 목판화로 찍어 신문 전면에 게재합니다. ‘민충정공 혈죽도’는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유일하게 비극적인 현장을 직접 그린 역사화이자 망국을 슬퍼하는 만장 같은 그림이었던 겁니다.

양기훈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3년간 ‘매화도 자수병풍’을 포함해 7점을 궁중에 헌상했습니다. 망해가는 대한제국에 왜 많은 작품을 바쳤을까요. 결코 일본이 좋게 보지 않았을 ‘민충정공 혈죽도’는 왜 그렸을까요. 아마도 유학자 출신답게 조선 왕실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게 너무나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생활이 풍족하지 못했던 단원 김홍도는 3000전짜리 그림 의뢰를 받자 2000전으로 매화나무를 사고 800전으로 술을 사 매화음(梅花飮)을 마련하고, 남은 200전으로 쌀과 땔감을 샀다고 합니다. 우리 옛 어른들의 풍류가 이러했습니다. 살아 있음을 향기로 전하는 매화나무 아래에서 매향을 맡으며 친구들과 매화음을 즐기는 것이 큰 호사가 된 요즘. 어깨춤 덩실거리는 ‘매화도 자수병풍’으로 어쩔 수 없는 봄 앓이를 달래보면 어떨까요. 봄은 이렇게 또 우리 곁에 다가왔습니다.

※ 자수병풍

병풍은 장방형으로 짠 나무틀에 종이를 바르고 종이·비단·삼베에 그린 그림·글씨·자수 등을 붙여 만든다. ‘은폐하다’ ‘앞을 가리다’ ‘나무를 둘러친 숲’이란 뜻의 ‘병’(屛)자를 쓴다. 장식성과 더불어 이동·설치가 편리한 편의성이 돋보이는데, 폭과 폭을 돌쩌귀로 접합해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한 거다. 그래서 짝수폭이 기본이다. 2폭에서 12폭까지 다양하다. 이 중 수를 놓아 만든 것을 ‘수병’이라 했다. 병풍을 비롯해 궁중에서 사용한 물건에 수를 놓는 ‘궁중자수’는 궁중의 화원이 밑그림을 그리고 수방에 소속된 나인들이 제작했는데. 고종에 이르러 궁중에 ‘구조조정’이 있자 궁 밖으로 나온 수방나인들이 제작·납품을 담당했다. 궁중에 들어간 양기훈의 ‘매화도 자수병풍’은 이래저래 ‘특별한 케이스’였다. 평안남도 안주에서 난 안주수를 사용했는데, ‘최고의 자수’로 이름이 높았던 안주수는 남자가 자수장을 맡고 남자들이 수를 놓았던 거다. 밑그림부터 자수까지, 당대 유행을 선도한 평양화단을 대표한 양기훈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양기훈의 자수병풍으로는 ‘매화도 자수병풍’ 2점과 ‘자수매화도’ 1점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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