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에 막힌 에너지 대계…첨단산업 전력공급도 ‘흔들’

김형욱 기자I 2025.01.13 05:05:00

첨단산업 전력 수요 늘어나는데,
전력산업계는 정쟁 여파 '올스톱'
절충안 들고 국회 설득 나섰지만,
"급할 것 없어" 국회 반응은 냉랭
2031년부터 전력 수급 차질 우려
예정된 기업 투자 차질 가능성도

[이데일리 김형욱 하상렬 기자] 정치혼란 속 정부의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수립이 지연되며 전력 당국과 산업계도 사실상 ‘올스톱’ 위기를 맞았다. 정부는 전기본 수립 속도를 내기 위해 우선 야당 측 요구를 반영해 원전을 줄이는 조정안을 내놓았지만, 국회가 이를 수용할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가 나온다.

◇11차 전기본 지연 전력설비 계획도 ‘일시정지’

12일 전력산업계에 따르면 전력기업들은 지난해 5월 나온 11차 전기본 초안에 따라 준비해오던 신규 사업을 대부분 중단시켜놓고 있다. 신규 원전 부지 선정은 물론 신·재생 발전의 간헐성에 대응한 양수발전소 신규 건설 사업 추진도 일시 정지됐다. 한국전력(015760)공사(한전)도 11차 전기본 확정과 함께 진행할 예정이던 11차 장기 송·변전 설비계획 수립 절차를 시작조차 못 했다.

[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작년 말 확정하려던 11차 전기본이 계엄·탄핵 정국 속 국회 보고 절차에서 막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에너지 산업이 다시 정치 공방 이슈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주도권을 쥔 국회는 신·재생 확충 계획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산업부의 관련 보고를 거부했고, 산업부는 원전 축소와 태양광 확대를 담은 조정안을 세워 오는 14일 다시 한번 국회 설득에 나설 예정이다.

정부 조정안의 핵심은 1.4기가와트(GW) 규모 원전 3기 신규 건설 계획을 2기로 축소하고, 2030년까지 태양광 발전설비 1.9GW를 추가 확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가스 화력발전소의 수소 혼소 발전량을 더 늘려 발전 과정에서의 탄소 배출량을 추가 감축한다는 내용도 더했다. 11차 전기본 원안대로라면 2036년 원전 비중은 35.6%(2023년 30.7%)까지 늘어나야 하지만, 조정안에는 35.1%로 줄어드는 내용이 담겼다. 같은 기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목표는 29.1%(2023년 9.6%)에서 29.2%로 늘어난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에너지정책학과 교수는 “원전은 2기를 함께 지어야 비용이 적게 드는 만큼 원전 3기 계획을 2기로 줄인 건 나름대로 합리적인 조정안”이라며 “계획이 빨리 확정돼야 전력 설비가 제때 건설되는 만큼 빠른 결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다만, 조정안에 대한 반응은 여전히 냉소적이다. 민주당 내에서도 의견은 분분한 데다 국정 공백기에 원전 신규 건설 계획이 확정돼 ‘알박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뒤따른다. 국민의힘도 정부가 전문가가 고심 끝에 만든 안을 야당의 요구에 못 이겨 수정한다는 불만이 크다.

정쟁 중인 국회 내에서 11차 전기본 수립도 급할 것 없다는 인식이 팽배하다는 것도 문제다. 해상풍력특별법이나 국가기간전력망확충 특별법 등 비쟁점 성격의 법안조차 지난 21대 국회 때부터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시간이 여유롭지 않다고 당국과 업계는 호소하고 있다. 전력 당국은 재작년 수립한 10차 전기본에 따른 현 계획으로는 당장 2031년부터 2.2GW 발전 설비가 부족해 전력 수급에 차질을 빚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실제로 10차 전기본 수립 이후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 등이 600조원을 투입해 경기도 용인 일대에 반도체 특화단지를 조성키로 하는 등 첨단산업과 관련한 대규모 전력 수요가 발생한 상태다. AI에 필요한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11차 전기본 수립 과정에서 2036년 수요전망치를 129.3GW(목표수요)로 2년 전보다 11.3GW 늘려 잡은 배경이다. 유 교수는 “전기 공급 계획이 확정 안 되면 기업도 정부를 믿고 투자할 수 없게 되는 만큼 국가 전체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계획 세우더라도 차기 정부서 ‘급변침’ 가능성

더 큰 문제는 11차 전기본 자체가 무력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치권의 예상대로 올 상반기 중 조기 대선이 열려 차기 정부가 수립된다면 에너지 정책 방향도 또다시 급변침할 수 있다. 현 여당 재집권 땐 원전 중심의 탈탄소 계획이, 야당 집권 땐 재생에너지 중심의 계획으로 다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한병화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국내 전력산업이 정책에 따라 춤을 추는 중”이라며 “11차 전기본이 수립되더라도 누가 집권하느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인 지난 2021년 12월29일 경북 울진군 신한울 3·4호기 건설중단 현장에서 탈원전 정책 전면 재검토, 신한울 3·4호기 건설 즉각 재개 등을 담은 원자력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정부는 앞선 2017년 출범 후 탈(脫)원전 정책을 내세워 앞서 전기본을 통해 확정된 신한울 3·4호기 등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취소·보류한 바 있다. 이들 사업은 원전 정책 복원을 내건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2022년 5년여 만에 재추진됐다. 특히 이번 11차 전기본이 원전 재건을 담은현 정부의 사실상 첫 계획인데 수립도 전에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서 원전산업계의 우려가 크다.

전문가는 원전 대 신재생은 대립 구도가 아니라며 정치권이 합리적이고 빠른 합의 절차를 거쳐 계획을 확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유승훈 교수 역시 “다른 선진국 사례를 보더라도 원전 등 에너지 정책이 바뀌는 건 불가피하지만, 여야가 잘 논의해서 빠르게 합의하고 계획을 확정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11차 전기본 수립을 총괄한 정동욱 정동욱 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부 교수도 “탄소중립이라는 기본 목표 아래 현실적으로 원전·신재생 하나만을 택일할 순 없다”며 “국회가 정해진 절차를 제때 이행해 안정적 중장기 전력 공급을 위한 절차를 밟아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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