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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성씨 고택 대청마루 내려서면 제주바다에 닿는다

오현주 기자I 2021.06.14 03:30:00

임창민 아트사이드갤러리 ''앳 더 모멘트'' 전
서울 창덕궁 수강재 밖 구미 대해폭포
제주 애월 해걸음 공사장 앞 포항바다…
사진풍경 속 움직이는 다른 풍경 영상
이질적 조합서 이상적 조화 찾은 작업
고요한 중에 움직임있는 ''정중동'' 세상

작가 임창민이 서울 종로구 아트사이드갤러리서 연 개인전 ‘앳 더 모멘트’에 건 미디어작품 ‘시간 프레임 속으로: 서울의 궁’(2018) 옆에 섰다. 규모 180×300㎝의 작품은 창덕궁 수강재를 촬영한 사진 안에 힘차게 떨어지는 구미 대해폭포수 영상을 심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완벽한 풍경이 아닌가. 고즈넉한 대청마루 저 밖으로 내다보이는 전경이 바다를 품었으니. 빳빳한 창호지 저 건너편으로 말이다. 어떤 날은 허옇게 부서진 포말이 밀려들고, 어떤 날은 바람이 일어 풀잎을 건드린다. 어떤 날은 푸른 폭포수가 속을 다 게워내고, 어떤 날은 내 집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노란 잎이 앞집 지붕을 물들인다. 굳이 우직한 고택이 부담스럽다면 현대식 세련된 장소로 옮겨갈 수도 있다. 테이블과 의자만 지키고 있는 정돈된 공간, 그곳에 난 창밖으로도 꽃잎은 떨어지고 구름이 움직이며 노을은 번진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세월도 가고.

그런데 말이다. 저 완벽한 풍경에 ‘균열’이 있다면 믿겠는가. 손 하나 보탤 데 없는 저 매끈한 장면에 ‘태생의 비밀’이 있다면? 맞다. 사실 완전체로 보이는 저 풍경에는 누군가가 작정한 금이 들어 있고, 그 금을 따라 나선 데에 창과 문이 나 있으며, 그 창과 문 너머로 전혀 의도치 못한 또 다른 풍경이 꿈틀대며 들어차 있는 거다.

알 듯 모를 듯한 이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다. 사진으로 촬영한 어느 풍경, 거대한 그 화면 안쪽에 사각 프레임이 ‘열려’ 있다. 액자처럼 걸린 게 아니라 열려 있는 거다. 그래서 문밖이고 창밖인 그 프레임 안엔, 사진이 이미 담아낸 전경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장면이 또 펼쳐지는데. 그저 다른 풍경 사진을 끼워 넣었나 보다 할 게 아니다. 풍경이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래, 짐작한 바로 그거다. 영상으로 촬영한 또 하나의 풍경. 파도가 밀려들고 나뭇잎이 흔들리고 폭포수가 떨어지고 눈이 내리는 그것들이, 사진 안에 길을 내고 있는 거다.

임창민의 ‘시간 프레임 속으로: 고택의 봄’(2021). 창녕 성씨 고택의 대청마루 문턱을 넘어서면 바로 내 발을 디딜 수 있을 것 같은 저 바깥풍경은 제주의 어느 바다다. 실제 작품에선 나뭇가지와 풀이 흔들리고 파도가 일렁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세상 속 세상 구경이 마냥 신기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드디어 그를 만났다. 이질적인 조합으로 기어이 이상적인 조화를 찾아내는 작가 임창민(50·계명대 응용미술학과 교수). 당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저 사진 속 문과 창, 영상을 앉히려고 일부러 내신 겁니까.” 친근한 목소리의 답이 돌아왔다. “인위적인 리터치는 없습니다. 벽을 뚫거나 창문을 내거나 하지는 않지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건 표시가 나니까요.”

닮은 듯 다른 결합이지만 그저 짜맞추기 위한, 조작의 합체는 아니란 얘기다. 그때부터 비로소 그가 만든 ‘정중동’의 세상에 온전히 빠져들 수 있게 됐다. 그 안엔 ‘숨죽인 듯 고요한 가운데 어떤 움직임’이 있었다. 드라마틱한 움직임이.

임창민의 ‘시간 프레임 속으로: 계단에서 본 남해 뷰’(2021). 작가가 재직하고 있는 계명대 어느 건물 계단의 난간 너머로 잔잔하게 일렁이는 남해의 물결이 내다보인다. 건물 계단은 사진으로, 남해는 영상으로 촬영한 것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사진과 영상, 이질적 조합으로 이상적 조화를 찾아

서울 종로구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 작가 임창민의 ‘프레임’들이 걸린 곳이다. ‘앳 더 모멘트’(At the Moment)라고 했다. ‘지금에’란 뜻이려나, ‘현재에’란 뜻이려나. 굳이 그런 주제의 전시명이어야 한 건 역설적으로 ‘지금에’로도, ‘현재에’로도 가능하기 때문일 거다. 두 개의 공간을 펼치고 두 개의 시간을 가둬 우리 눈앞에 나란히 펼쳐놓는 일이니까.

그렇다. 사진과 영상 그 합체로 작가가 담아내려 한 것은 사실, 풍경 그 이상인 ‘시간’이다. 그 시간을 담아내려는 데 풍경이 적절했을 뿐이고,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려는 데 사진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인가. 작가는 모든 작품에 ‘시간 프레임 속으로’(Into a Time Frame)란 타이틀을 붙였다.

작가 임창민이 서울 종로구 아트사이드갤러리서 연 개인전 ‘앳 더 모멘트’에 건 미디어작품 ‘시간 프레임 속으로: 에콜라파크’(2021) 옆에 섰다. 대구의 한 카페(사진) 창밖으로 미국 포틀랜드의 에콜라파크 해변(영상)이 펼쳐져 있다. 영상에선 허연 포말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중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덕분에 그런 시간여행은 물론, 공간이동까지 가능해졌다. 창녕 성씨 고택의 마루문(사진) 밖으로 제주바다(영상)가 펼쳐지고(‘시간 프레임 속으로: 고택의 봄’ 2021), 제주 애월 해걸음 공사장(사진)에선 포항바다(영상)의 일출이 보인다(‘시간 프레임 속으로: 포항 해안 뷰’ 2021), 서울 창덕궁 수강재(사진) 너머론 구미 대해폭포(영상)가 뻗치고(‘시간 프레임 속으로: 서울의 궁’ 2018), 대구의 한 카페(사진) 창밖으론 포틀랜드 에콜라파크의 해변(영상)이 이어진다(‘시간 프레임 속으로: 에콜라파크’ 2021).

그럼에도 작가의 작품 안에선 시공간을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 멀쩡히 존재하는 실제공간을 사진으로, 영상으로 떡하니 꺼내놓고 “이런 데는 없습니다”하는 셈이니까. 그래서 작가의 작업은 최소한 그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를 향하는 일이다. 가령 그이의 전시작 중 유일하게 사진과 영상이 겹치는 해인사 연화문의 눈 오는 풍경(‘시간 프레임 속으로: 산사의 눈’ 2021)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말이다. “연화문을 통해 내다본 꽉 막힌 풍경이 늘 답답했다. 그래서 그 답답한 전경을 걷어내고 눈이 소복이 쌓인 지붕, 확 트인 하늘과 산세가 보이는 영상을 들였다.”

임창민의 ‘시간 프레임 속으로: 산사의 눈’(2021). ‘해인사 연화문’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전시작 중 유일하게 사진과 영상이 겹치는 장소다. 그럼에도 실제 ‘해인사 연화문’에선 저 바깥세상을 찾아볼 수가 없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미리 ‘결합’을 계획하기도 하지만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게 대부분이란다. 시간을 담아두는 작업이지만 정작 작가의 시간은 ‘잴 수도 없다.’ 눈 오는 날 풍경은 10년에 걸쳐서 제작했다고도 하니. “사진을 먼저 찍을 때도 있고 영상을 먼저 찍을 때도 있다. 촬영을 빼고 한 점 제작에만 2∼4주가 족히 걸린다.”

◇멈춤과 움직임 늘 공존하는…어차피 이중적 세상

미디어아티스트로 불리는 작가지만 사실 전공은 사진도 영상도 아닌 응용미술이란다. “회화와 디자인의 경계라고 할 거다. 대학시절 사진에 기웃거렸던 게 계기가 됐다.” 그간 시도해온 형태는 다양하다. 비행기 창문 밖을 내다보게도 했고 회색벽에 걸린 액자를 들여다보게도 했다. 이번 전시작이 좀더 ‘생생’할 수 있었던 건 2019년 연구년으로 가 있던 미국 포틀랜드에서 촬영한 사진·영상을 보탠 덕이다. 전시에는 폭 300㎝ 대작부터 한눈에 들어오는 75㎝ 남짓한 작품까지 16점을 걸었다. 에디션은 8점 정도 만든다고 했으니 흔치 않은 ‘베스트 중 베스트’를 옮겨왔을 거다.

임창민의 ‘시간 프레임 속으로: 햇살 비치는 오레곤 해안’(2021). 미국 포틀랜드의 후드리버란 동네서 촬영한 사진에 오레곤 해안의 파도치는 풍경의 영상을 넣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이상적 그림’이 미혹하는 힘은 적지 않았다. 180×300㎝인 ‘시간 프레임 속으로: 서울의 궁’(2018)을 비롯해 작가의 작품은 주로 기관·기업에 팔려 나갔는데. 멀리는 뉴욕대, 골드만삭스그룹, MOCA상하이가 있고 국내에선 국립현대미술관, 대구미술관 등 미술관 외에도 SM엔터테인먼트, 신영그룹, 보광병원 등 기업·병원에서 많이 찾았다. 멀지 않아 인천공항 제1터미널에선 5×7m 전광판으로도 볼 수 있을 거란다.

한바탕 긴 여행을 끝내고 진짜 현실로 돌아오는 길. 새삼 뒤돌아본 세상풍경이 작가의 작업을 닮아 있었다. 저곳에선 고정된 하나의 프레임을 서로 강요하지만, 그 안쪽세계는 늘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지 않던가. 어차피 세상은 그렇게 이중적이란 얘기를 작가가 에둘러 꺼내놨을 뿐이다. 멈췄다고 생각한 것이 움직이고, 흔들린다고 믿는 것이 정지해 있는. 실제라고 확신했으나 환상이었고, 꿈이라고 몰아갔던 일이 현실이 되는. 문득 ‘포항 화진해수욕장 허름한 간이건물 밖에 펼쳐진 제주 사계바다의 해넘이’가 아른거리는 것을 보니, 그 세상 구경을 제대로 한 거지 싶다. 전시는 7월 3일까지.

임창민의 ‘시간 프레임 속으로: 화진해변의 일몰’(2021). 포항 화진해수욕장의 허름한 간이건물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제주 사계바다다. 해 그림자는 사진으로 촬영한 화진해변에만 드리워졌을 뿐, 제주의 흰 파도를 촬영한 영상에선 찾아볼 수 없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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