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주(전남)=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어느덧 여름 기운이 꺾였다. 아침저녁 선선하고 해도 제법 짧아졌다. 길가에 노란 마타리가 하늘하늘 흔들리고. 여기저기 연보랏빛 쑥부쟁이가 무리지어 피어나고, 넝쿨이 뒤덮인 곳에 사위질빵 하얀 꽃도 고개를 든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여름 끝자락, 가을 느낌 물씬 풍기는 전남 나주로 향했다. 500년 역사를 간직한 도래마을이 이번 여행길의 최종 목적지. 골목마다 옛 정취가 넘실대는, 요란하지도 그렇다고 화려하지도 않은 전통마을이다. 대신 어릴 적 뛰어놀던 고향마을 같은 푸근함이 가득하다. 눈길 가는 곳마다 예스럽고 세월의 더께가 묻어난다. 이뿐이랴. 물 흐르듯 유연한 곡선을 그린 처마와 담장이 시선을 붙든다. 자연스레 까치발을 하고 담장 너머의 집 구경에 나섰다.
◇호남의 3대 명촌으로 불린 ‘도래마을’
전남 제일의 곡창인 나주평야. 도래마을은 이 넓은 벌판에서도 알아주는 부자마을이다. 오죽하면 ‘남평 땅은 풍산 홍씨 땅을 밟지 않고는 못 지나간다’고 할 정도. 나주는 물론 인근 영암까지 알려진 그 위세에 ‘호남의 3대 명촌’으로도 불린 동네가 바로 여기였다.
마을을 병풍처럼 감싼 식산(食山) 아래 터를 잡은 이 마을은 나주평야를 앞뜰 삼은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마을. 사실 도래마을의 원래 이름은 도천마을이었다. 식산 감투봉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세 갈래로 갈라져 내 천(川)자를 이룬다고 해서였다. 이후 도천이 우리말로 바뀌면서 ‘도내’로 변했고, 이게 ‘도래’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마을은 이 세 물길 따라 ‘후곡’, ‘동녘’, ‘내촌’으로 나뉘게 됐고, 마을의 중심은 자연스레 동녘이 됐다.
|
도래마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 마을의 역사는 약 500년 전부터다. 마을에 처음 자리를 잡은 이는 고려시대 남평 문씨. 이후 조선시대 초기에 강화 최씨가 들어와 같이 마을을 이뤘다. 이후 조선 중종 때 풍산 홍씨인 홍한의가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마을의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조광조와 인연을 맺었던 그는 기묘사화의 화를 염려해 낙향했다. 풍산 홍씨의 집성촌이 된 출발점이었다. 이후 대를 이어 홍씨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아왔다. 지금도 100여 가구 중 70가구 정도가 홍씨가 그 주인이다. 역사가 긴 만큼 제법 이름난 이들도 많이 나왔다. 대표적인 이가 소설 ‘임꺽정’으로 유명한 홍승묵, 1970∼1980년대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던 홍남순 변호사가 이 마을 출신이다.
|
이제 마을을 구경할 차례다. 마을 어귀 오른쪽에는 ‘영호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오래전 ‘도천학당’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사람들의 쉼터로 쓰이고 있다. 왼쪽에는 양벽정이 있다. 마을 양반들이 풍류를 즐겼던 정자다. 지금은 홍씨 가문의 대소사를 치르는 공간으로 쓰인다. 매년 한 차례 ‘도래의 날’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 고향을 떠난 외지인들이 모여 음식을 만들고, 체육대회 겸 잔치를 벌이는 곳이다. 설날에는 남녀노소 온 마을 사람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나와, 떡국을 먹고 세배하고 덕담을 나눈다. 풍산 홍씨뿐만 아니라 모든 주민이 함께하는 명절 행사다.
마을 앞 연못도 근사하다. 연못 안에 세 개의 산을 만들어 놓았다. 삼신산(三神山)을 염두에 둔 듯한 모습이다. 이 연못을 배경으로 중층 대문의 양벽정이 근사하게 자리하고 있다. 또 그 오른쪽 해묵은 나무 그늘 아래에는 영호정이 아늑하게 들어서 있다.
|
◇집집마다 대문이 ‘사다리 대문’인 이유는?
도래마을의 매력은 바로 옛집이다. 마을에는 옛집들이 많은데, 모두 풍산 홍씨의 고택이다. 재미난 점은 빈집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오래전부터 살아온 주민이나 새로 이사 온 사람도 모두 골목과 마당, 정원 가꾸기에 정성을 쏟고 있어서다. 덕분에 한옥과 어우러진 풍광에 정갈한 기품이 넘친다.
‘도래마을옛집’부터 들른다. 마을의 안내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주민들이 모은 돈으로 터를 사고 복권기금으로 안채와 문간채를 복원했다. ‘옛집’이라 부른 것도 특별하다.
홍기응 가옥은 풍산 홍씨의 종가다. 안채는 1892년, 사랑채는 1904년에 지어졌다. 조선 전통 조경에 남도 양반주택의 구성을 볼 수 있는 가옥이다. 솟을대문 옆 배롱나무에도 세월이 스며 있다. 옛날 부잣집의 기품 그대로다. 책을 보관하는 장서각이 따로 있는 것도 별나다. 옛주인이 책을 가까이 한 당대의 독서광이었던 모양이다. 종갓집답게 솟을대문에서 연결되는 높은 돌담이 운치 있다. 담쟁이와 능소화가 어우러지고, 상사화와 봉숭아가 곱게 핀 돌담을 따라 잠시나마 과거로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다.
|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은 홍기헌 가옥(우남고택)이다. 도래마을옛집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특이하게 양반집인데도 소슬대문이 아닌 초가대문이다. 안채부터 대문채까지가 거의 일직선 상에 놓이듯이 배열한 점도 독특하다. 사랑채는 1732년, 안채는 1910년도에 지어졌다. 가옥의 뒤 곁에는 굴뚝과 장독대가 있는데, 장독대에는 옹기그릇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
홍기창 가옥도 오래됐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가 있었지만, 지금은 안채만 남아 있다. 마당 한쪽에 부속 건물을 지어 민박으로 활용하고 있다. 안채로 이어지는 중문을 대문으로 이용하는데, 문으로 연결되는 골목에 온갖 화초를 심어 잔잔하면서도 화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요즘은 배롱나무가 진분홍 꽃송이를 늘어뜨려 운치를 더한다
둘러보니 이 마을은 다른 마을과 차이점이 몇가지 있다. 첫 번째는 집마다 샛문이 있다는 것이다. 도래마을은 풍산 홍씨와 강화 최씨로 구성된 집성촌. 마을 주민 대부분이 일가친척이다. 이들은 이웃집을 자기 집처럼 편하게 드나들며 자랐다. 그래서 큰 문보다는 샛문을 자주 이용했다는 것이다.
‘대문’의 생김새도 다르다. 집마다 모두 ‘사다리 대문’이다. 대문에 나무를 덧대 사다리처럼 세 개의 단을 만들어 놓았다. 이유가 있다. 가난하고 배곯은 이웃이 덧댄 나무를 밟고 넘어와 문간에 놓여 있는 쌀을 가져다 허기를 달래라는 의미였다.
마을 뒤편 식산 정상에 오르면 마을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식산 정상까지 2.2㎞ 거리다. 경사도 급하지 않다. 솔방솔방 걷기가 좋다. 감투봉과 식산 정상이 금방이다. 이곳에 오르면 드넓은 나주평야와 굽이굽이 흐르는 영산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