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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파장을 일으킬 통일과 영토에 관한 헌법 개정을 유보하고 인민생활향상과 관련한 ‘경공업법’과 ‘대외경제법’을 채택한 것은 미국 대선 등 대외변수를 지켜보면서 정세를 관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통일문제, 민족문제, 영토문제는 국가와 정권의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로 당위성과 실효성의 괴리 등 검토할 내용이 많아 감정적으로 다룰 문제가 아니다. 북한의 수령체제 통치논리에 따르면 헌법 위에 당규약이 있고 그 위에 수령의 ‘교시’가 자리 잡고 있다.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이 ‘두 국가 교시’를 내렸기에 헌법 개정 여부와 관계없이 ‘적대적 두 국가관계’와 관련한 조치를 실행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허물었던 경계선을 다시 쌓고 국경선으로 ‘요새화’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북한 군 총참모부는 10월 9일자로 “공화국의 주권행사영역과 대한민국 영토를 철저히 분리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군사적 조치를 취한다는 것을 공포”했다. 과거 군사분계선(MDL) 남쪽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통일을 가로막는 장벽이라며 철거를 요구했던 북한이 스스로 장벽을 만들고 요새화하고 있는 것은 분단체제의 역량관계를 반영한 체제경쟁의 ‘거울영상’(반복)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이 통일·대남기구를 폐지한 것도 체제역량이 우세한 쪽에서 올라오는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은은 최고인민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창립 60돌을 맞은 ‘김정은국방종합대학’을 방문해 연설했다. 김정은은 “대한민국이 안전하게 사는 방법은 우리가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게 하면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솔직히 대한민국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독립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살아갈 테니 대한민국이 안전하게 살려면 “때 없이 건드리지 말며”, “‘힘자랑’ 내기 하지 않으면 될 일”이라고 주장했다.
서로 의식하지 않고 간섭하지 말고 제 갈길을 가자는 주장인데 그렇게 말하는 근저에는 ‘핵 국가’라는 지위를 내세운 자신감과 체제경쟁의 열등감이 뒤얽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연설에서 김정은은 헌법 개정과 관련한 언급 없이 “‘만약’이라는 가정하에 우리의 헌법은 우리 군에 엄격한 명령을 내릴 것”이라면서 조건부 대남 핵무력 사용을 숨기지 않았다.
김정은이 “조선반도에서 전략적 힘의 균형 파괴는 곧 전쟁을 의미한다”며 “적을 항상 억제하고 정세를 관리할 수 있는 물리적 힘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북한이 ‘국가핵무력 완성’ 선언을 하고 ‘절대적 힘’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정세관리용 물리적 힘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강대강 힘의 대치는 지속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중국, 러시아와 동맹조약을 맺고 스스로 ‘핵 국가’라고 하면서도 ‘핵에 기반한 한미동맹’과 힘의 균형을 맞춰나가겠다니 김정은이 말하는 ‘정세관리’는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 주적에서 대한민국을 제1 적대국·불변의 주적으로, 미국과 대한민국이 주적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가 주적이라고 하는 등 북한의 주적관은 오락가락하고 있다. ‘대한민국 족속, 괴뢰’를 ‘제1 적대국’이라고 한다면 미국은 제2 적대국이 되는 문제가 있고 두 국가를 말하면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대한민국 영토를 점령 평정 수복한다’고 했는데 ‘수복’은 두 국가 지향과 맞지 않다. 논리적 모순이 많은 것을 볼 때 최근의 남북관계 상황을 반영한 김정은의 감정적 대응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수령체제는 최고지도자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그래서 지도자의 오판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