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 열사는 2남2녀 중 장남이었다. 어려서부터 살림에 보탬이 돼야 했다.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 시절 학교를 그만두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을 시작했다. 동대문 시장에서 행상일이 시발이었다.
17살이 되면서는 청계천 평화시장 삼일사에 보조원으로 취직했다. 어려서 배웠던 재봉일을 바탕으로 전 열사는 재봉틀을 다루는 재봉사가 돼 처음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 열사는 자신이 노동하는 과정에서 목격한 불합리를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영세한 규모의 공장들은 비좁은 공간에 노동자들을 몰아넣고 하루에 14시간씩 노동을 강요했다. 불빛도 흐릿하고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열악한 공간이었다.
이 곳의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전 열사와 비슷하게 13살 남짓한 때부터 노동에 내몰린 소녀들이 많았다. 강도 높은 노동을 해야했지만 초과근무수당은 딴나라 이야기였다.
전 열사는 이들이 처한 어려움에 맞섰다.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업무적으로는 나아져서 처우가 좋은 재단사로 올라섰으나 열악한 환경에서 폐렴을 얻어 해고된 여성을 돕다가 해고되는 일을 겪었다.
전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면서 공부에 천착했다. 법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해야겠다는 의지를 불살랐다.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조직을 만들어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주변에 알렸다.
그 덕에 평화시장에서 쫓겨났지만 다시 돌아와 ‘삼동회’를 조직하고 다시 노동문제를 다뤘다. 전 열사는 노동환경을 조사해 청와대와 서울시, 노동청 등에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사회적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1970년 11월 13일 전 열사는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벌이는 퍼포먼스를 준비했으나 경찰의 방해로 무산되자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사실상 그의 유언이었다.
병원에 실려간 전 열사는 어머니 이소선씨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젊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한국 노동운동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