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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참 어이없는 장면이 아닌가. 나 보기가 역겨워 가겠다는 것도 환장할 노릇인데, 영변 약산에서 아름 딴 진달래꽃까지 뿌리겠다니. 걸음마다 사뿐히 즈려밟고 가라고 한다, 죽어도 눈물은 흘리지 않겠다고.
얼추 100년 전 김소월이 쓴 시 ‘진달래꽃’(1922)은 애써 감춘 지독한 격정이었다. 떠나는 너를 아무 조건 없이 ‘말없이 고이’ 보내주마. 다만 진달래꽃에 묻힌 내 처절한 사무침은 알고 가라. 그러니 질끈 밟고 가라, 가버려라.
맞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네’ 발밑에 짙게 베어나올 진달래 꽃물이 대신 울어주리란 것을. 고고하고 오묘하고 처연하기까지 한, 진달래색 꽃물이 말이다.
한참을 진달래색에 취해있는데, 의외의 질문이 떨어졌다. “왜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인지 압니까?” 영변이라면, 북한의 핵시설이 있다는 거기가 아닌가. 험악한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그곳. “바로 그 영변에서 토양이 가장 좋은 데가 약산이랍니다. 그러니 거기서 피는 진달래가 색이 좋을 수밖에요. 그렇게 맑은 색을 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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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상에 진달래꽃을 탐한 사람은 둘이다. 이젠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을 탐한 사람도 둘이 됐다. 한 사람은 시인 김소월, 다른 한 사람은 화가 김정수(66)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선화랑. 눈에 들이다가 마음에까지 들이는 진달래꽃이 한 보따리다. 누군가의 발 아래 뒀던 진달래꽃이 고봉밥이 된 그 자리다. 그렇다. 김 작가의 진달래는 김소월의 그것과는 다르다. ‘어머니의 서정’을 들였다. 한 소쿠리 그득하게 채워내곤 모든 허기진 이들에게 ‘어서 와서 한술 떠라’ 한다. 그래서일 거다. 2년 만에 돌아왔어도 김 작가의 개인전은 변함없이 ‘진달래-축복’이다.
◇파리서 우연히 마주친 백남준이 바꿔놓은 진로
홍익대 미대를 다니던 그이가 졸업도 하기 전 프랑스 파리로 간 건 1983년. “아방가르드 미술을 꿈꿨더랬다. 백남준 선생의 비디오아트나 퍼포먼스에 마음이 끌렸다. 그런데 아방가르드를 하겠다고 찾아간 파리에 작가들 작업의 90%가 평면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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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방황이 시작됐다. 그러다가 장난처럼, 파리의 한 거리에서 그 백남준과 마주친 거다. 유학생이 많지 않던 시절, 고국에서 온 젊은 작가를 백남준은 반겼고 한참 대화가 이어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얘기를 듣던 그 하늘 같은 양반이 고개를 가로젓는 게 아닌가. ‘컴퓨터 작업은 어렵고 돈도 되지 않는다’고, ‘평면작업을 하라’고. “그 영향이었을 거다. 아방가르드를 접고 차가운 추상회화로 돌아섰다.”
덕분에 파리 한 갤러리의 전속작가도 됐고 영주권도 나왔다. “진짜 파리지앵이 되나 보다” 들뜨기도 했더랬다. 하지만 고비를 다 넘은 게 아니었다. “1990년대 초 국내 전시를 위해 잠시 귀국했던 그때 서울 한 레코드가게에서 울려 나오던 노래 한 자락이 마음을 흔들어놨다. ‘그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오늘은 울고 싶어라’ 하는.” ‘그대 가슴’이 꼭 대한민국의 품인 것 같더란 거다. 작가의 표현대로 “장밋빛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적인 것을 찾아 헤맨 건 그 ‘소리’와 함께였다. “닥치는 대로 찾고 읽었다. 이규태의 칼럼 ‘한국인의 의식구조’에다가 ‘이상의 오감도 평전’까지 읽었으니.”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걸 그려야겠구나. 뭘 좋아하지? 꽃! 그러면 무슨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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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역사’ 꺼내놓은 2년 만의 개인전
2004년 ‘그 꽃’으로 귀국 후 첫 전시를 했다. 찾는 건 버거웠지만 찾고 나니 하나씩 풀려나갔다. 진달래는 그이에게 곧 어머니였던 것을 기억해냈다. 중학교 3학년 때 가출했다 돌아온 아들의 손을 잡고 산에 오른 어머니는 지천에 널린 진달래꽃을 가리키며 ‘허투루 피는 꽃은 하나도 없다’고 일러줬더랬다.
처음부터 고봉밥도 아니었단다. 바람결에 한 잎씩 흩날리다가 모여든 거다. 꽃잎 하나로 시작한 진달래는 어머니 생각이 커질 때마다 부풀어 올랐다. 밥그릇을 채우고 소반을 채우고 소쿠리도 채우고 그러다가 밑이 깊은 대바구니까지 채웠다. 그러는 사이 상차림도 다양해졌다. 10호 안팎으로 소소하게 얹어내던 모양이 100호(162×133㎝)를 넘겨, 200호(194×259㎝)를 넘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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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점을 꺼내놓은 이번 전시가 특별한 건 작가의 ‘진달래 역사’가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와지붕 낮게 깔린 밤하늘에 꽃잎 몇 조각만 날리고(‘기억의 저편’ 2006), 황토빛 하늘을 가로지른 전신주 위로 눈처럼 내리는 꽃잎을 그린(‘이 땅의 어머니들을 위하여’ 2005) 초기작이 드물게 나왔다. 이후 꽃잎은 눈 덮인 황량한 겨울 벌판을 날아(‘진달래-축복’ 2008), 건물이 빼곡히 들어찬 도시의 회색하늘에도 잠시 머문다(‘진달래-축복’ 2015).
진달래의 긴 여정은 2019년 파격적인 외출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데. 캔버스 대신 TV화면에 회화작품을 ‘출연시킨’ 미디어아트의 탄생이다. 허공에서 떨어진 꽃잎 하나하나가 조용히 내려 갈색 소쿠리에 차곡차곡 쌓이고, 낮게 깔린 도시머리에도 내려앉는 ‘움직이는 그림’을 만들었다(‘진달래-축복’ 3분 영상·2019). “단순하게 생각했다. 스케치나 채색이 모니터에서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그림이 캔버스를 떠나 기술이 든 화면에 구현됐으면 좋겠다고.” 평면이지만 평범한 평면은 아닌 이 작품들도 전시장에 함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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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하면 철쭉이 되고 연하면 벚꽃이 된다”
작가가 그리는 진달래는 분홍색이 아니다. ‘진달래색’이다. 그 색을 내는 데 10년 이상이 걸렸다고 했다. 아마포 위에 바탕색을 칠해 짙은 붉은색이 배어 나오게 한 뒤 흰색·검은색·푸른색·분홍색 등을 덧입혀 원하는 진달래색이 나올 때까지 우려내는데. 한 번이라도 덜 칠하면 색은 달라진단다. 초창기 언젠가는 전시를 위해 작품을 모아뒀는데 어느 날 보니 모두 철쭉으로 변해버렸더란다. “색이 연하면 벚꽃이 되고 진하면 철쭉이 된다. 아스라하게 반투명한 색을 내는 게 관건이다.”
그렇다고 꽃잎 그리기는 수월하겠나. 세필로 하나하나 ‘심어내는’ 중노동은 필수다. 대바구니는 또 어떤가. 까칠한 결은 살리면서 삐져나오는 진달래를 슬쩍 가둬내는 입체감이 생명이다. 말이 좋아 ‘진달래 화가’지 ‘그림 그리는 노동자’였던 거다.
빛나는 봄날에 마음이 스산하다면 그것은 ‘꽃’ 탓이다. 근사한 식당의 성찬에도 속이 허하다면 그것은 ‘밥’ 탓이다. 작가는 그걸 알았던 거다. 그래서 삶을 보듬는 일, 세상에서 가장 고된 일을 자처한 거다. 올봄 진달래꽃은 그새 훌쩍들 떠났나 보다. 간다는 말 대신 고봉밥 한 소쿠리만 가득 채워 놨다. 전시는 11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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