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대사 한마디에 영화 ‘범죄와의 전쟁’ 속 정마담이 무대 위로 소환됐다. 찰진 부산 사투리로 관객의 기억을 단숨에 불러낸 이는 배우 김혜은. 첫 연극 도전에서 그는 냉정과 온정을 오가는 인물의 양면성을 노련하게 소화했다. “죽었는 줄 알았는데 고마 살았는갑네”라며 동생 기생(김소혜 분)에게 매정한 말을 내뱉지만, 이내 꽃신과 가락지를 챙겨주는 모습으로 무대 위 존재감을 또렷하게 남겼다.
|
이번 공연은 여성 2인극으로 구성됐다. 김혜은은 여자 1역을 맡아 ‘1593년 임진왜란 시기 기생’(1장)을 비롯해 ‘1950년 옥순’(2장), ‘1979년 잡화점 주인’(3장), ‘2025년 명신’(4장) 등 서로 다른 시대의 인물을 넘나드는 연기를 펼친다.
13일 서울 강남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혜은은 “연극을 해보니 힘들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며 “작품과 인물을 깊이 탐구할 수밖에 없고, 긴 훈련 끝에 결과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
연극 출연은 우연한 대화에서 시작됐다. 3년 전 드라마 ‘남남’을 촬영하던 중 극단 간다의 작품을 봤다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 계기가 됐다. 극단과 가까운 동료 배우가 “‘그때도 오늘’ 시즌 2를 준비한다더라”며 귀띔했고, 이후 자연스럽게 극단과 연결됐다. 1년 반을 기다린 끝에 무대에 오른 김혜은은 “꽃신이라는 매개를 통해 그 시대를 견뎌낸 평범한 여성들의 서사가 더 아련하고 아프게 다가왔다”고 전했다.
이번 공연은 서로 다른 시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4개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독립된 여러 이야기를 묶은 형식)으로 펼쳐진다. 김혜은은 “1장에서 ‘니 참 사투리 안 는다’라는 대사를 던졌을 때 관객이 빵 터지면 그날의 객석 분위기를 바로 알 수 있다”며 “관객이 열려 있으면 나 역시 신이 나 애드리브를 하게 된다”고 말하며 웃었다.
1950년대 장에서는 평범한 두 자매의 일상을 보여주면서도, 배경에는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놓여 있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 좌익으로 의심되거나 관련 명단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빨래를 개며 동생과 투닥거리던 그는 문밖에서 소식을 전하는 이를 향해 “쌀 받았다고 우리 엄니를 왜 죽여요!”라고 외치며 주저앉아 울부짖는다. 억울한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그 시절 평범한 이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순간, 객석도 숨을 죽였다.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장면에서는 YH 사건(여성 노동자 농성 진압 중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을 축으로, 자신의 신발가게에 뛰어든 여자 2와 대사 없이 수화로 감정을 주고받는다. 김혜은은 “사실 그간 매체를 통해 보여진 나의 이미지로는 기생이 가장 잘 드러맞을 것”이라며 “양면적인 감정을 대사로 표현해야 하는 1장, 말이 아닌 수화로 감정을 풀어내야 하는 3장에서 정서를 어떻게 풀어낼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설명했다.
|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워낙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 탓에 여전히 그를 정마담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그는 “‘범죄와의 전쟁’은 너무 고마운 작품이지만, 동시에 ‘이걸 넘어설 작품은 없을까’를 고민하게 만드는 딜레마도 있다”며 “다행히 요즘은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양코치로 기억해주는 분들도 많다”며 웃어 보였다.
연극 무대는 그에게 또 하나의 가능성이 됐다. 김혜은은 “좋은 작품이 있다면 언제든 다시 연극에 도전하고 싶다”며 “언젠가는 1인극에 도전해 내밀한 연기도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