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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드러났지만 이를 제어할 수 있는 ‘교정 메커니즘’이 작동한 것은 시민사회의 역량이 커졌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일부 군 인사가 가담해 일으킨 ‘친위 쿠데타’가 실패한 것은 ‘제도로서의 군부’가 정치개입에 소극적이거나 반발했기 때문이다. 군의 정치개입은 ‘1987년 체제’ 수립과 하나회 척결로 사라지는 듯했다. 이번에 군을 동원한 정치개입 시도를 계기로 과거 군부의 정치개입을 되짚어 본다.
박정희와 전두환 개발독재시대에 군부와 관료, 재벌(자본)이 지배동맹을 맺는 ‘관료적 권위주의’를 통해 압축 정상을 이뤄냈다. 자본과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유치를 통한 개발촉진 전략’을 채택한 박정희 정권은 저임금과 저곡가(이중곡가제) 정책을 통해 노동자와 농민의 분배 요구를 억압·배제하고 재벌을 육성해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성장의 과실은 노동자와 농민 등 근로자들에게 확산해 중산층을 만들어냈다. 개발독재가 만들어낸 중산층이 민주화의 주역이 돼 대통령 5년 단임제의 ‘1987년 체제’를 만들어 냈다.
박정희 정권은 마산자유무역지대 등을 설치하고 외국자본 유치에 국가가 지불보증을 하는 등의 특혜를 베풀며 노동운동에 공권력을 동원해 기업 활동을 지원했다. ‘유치를 통한 개발촉진 전략’은 중국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에 입각한 특구설치 전략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군부에 의한 개발독재를 공산당에 의한 개발독재로 원용해 중상주의적인 발전전략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나라가 중국이다. 사회주의 붕괴 직후인 1991년 북한도 박정희식 개발독재 모델을 원용해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를 설치하고 외자 유치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중국은 ‘진리의 표준은 실천’이라는 실사구시를 내세우고 생산력 발전에 유리하다면 자본주의도 수용할 수 있다는 ‘흑묘백묘론’(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따지지 않고 쥐를 많이 잡는 것이 좋다는 실용론)에 따라 해안지구에 특구를 설치하고 외국자본을 적극 유치해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중국이 생산력 발전을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상이론적 조정을 했다면 북한은 사상이론적 조정 없이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외자 유치를 하고자 했기에 실패했다. 자본은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 투자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도 북한은 자력갱생을 고집하며 파병을 통해 외화를 획득하고 군 인력을 국가발전의 주력군으로 내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