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이 캄캄해졌다. 저장 키를 누르지 않고 작업을 하다 엉뚱한 키에 손을 댄 바람에 애써 쓴 원고지 30여 매 분량의 내용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만 것. 밤 열두 시를 넘긴 시각...머릿 속이 하얗게 됐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기억을 하나하나 되살려 다시 쓰는 수밖에. 밤을 꼴딱 새워 마무리한 원고는 일본 100엔숍 경영의 귀재로 불린 다이소의 야노 히로다케 사장 이야기. 장돌뱅이 트럭 잡화상 출신의 그가 2000년대 초반 유통시장에 몰고 온 초염가 판매 돌풍의 위력과 괴짜 인생을 도쿄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약 7년의 시간이 흐른 2008년 초가을 날 경기도 기흥의 한 물류센터. 기자는 수수한 작업 점퍼 차림의 중년 기업인과 마주 앉았다. 아성다이소의 박정부 사장(당시)이었다. 인터뷰 내내 겸손하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잃지 않았던 그의 입에서는 “생활물가를 낮추는데 기여하고 싶다”는 포부와 열정이 잔잔히 흘러나왔다. 일본 다이소와의 인연 및 관계를 묻는 질문에는 일본 기업이라는 세간의 오해에 답답해하는 표정이 읽혀졌다. 야노 사장 스토리를 이미 책으로 펴낸 데다 일본 다이소 매장을 수없이 지켜봤던 기자의 마음 한구석엔 호기심이 잔뜩 깔렸다. “일본 다이소의 그늘을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한 기업인의 책이 세밑 서점가의 큰 화제가 됐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와 찬찬히 읽어 봤다. ‘천원을 경영하라’는 제목으로 박 회장이 최근 쓴 책이었다. 반가운 한편 궁금하기도 해 서점에 가 책을 펴들었다. 성공한 기업인의 대다수 책이 그렇듯 표지는 그의 사진을 올려놓고 그 곁에 ‘국민가게 다이소의 경영 신화’ ‘박 회장의 본질 경영’이라는 문구를 곁들였다. 겉으로만 본다면 대다수 기업인들의 자화자찬성 회고록이나 평전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선입견은 바뀌었다. 단숨에 거의 끝까지 읽게 됐다. ‘고뇌와 갈등, 절망과 환희, 그리고 도전...’ 박 회장이 사업에 뛰어든 후 약 30년간 온몸과 머리로 겪은 희로애락의 일화가 선명하게 펼쳐졌다. 회고록이나 평전 등의 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천원의 힘으로 연매출 3조원의 기적을 쌓아 올린 맨손 창업가의 살아 있는 경영학 교과서 같은 느낌이었다. “아직도 고객이 두렵다”는 그가 모든 것을 가감없이 털어놓고자 한 고백서이자 ‘국민가게’의 주인으로서 고객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다짐과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기자의 눈길을 특히 잡아끈 것은 일본 다이소와의 관계 및 여성 인력 활용에 관한 대목이었다. 납품업체로 시작한 일본 다이소와의 거래 과정에서 그는 깐깐한 일본 임직원들로부터 홀대는 기본이고 거친 언사로 모멸감까지 느낀 적이 많았지만 끝내 이를 극복했다. 그리고 25년 이상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품 개발, 운영 시스템 및 물류센터 등 여러 면에서 일본 다이소의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삼성전자 등 초일류 대기업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됐던 일본 기업 추월의 가능성을 천원짜리 상품으로 거의 절반을 채운 국민가게가 확연히 보여준 셈이다. 매장 직원의 95%, 직영점 점장의 99%를 여성이 맡고 있는 다이소의 박 회장은 여성들의 육아 경험과 살림 센스를 경영에 접목시킨 혜안을 가졌다. 30~50대 경력단절 여성 비율이 2022년 기준 93%에 이른다는 점에서 볼 때 숨은 보석들을 산업 현장으로 이끈 공로자다.
그러나 성공의 열쇠는 일하는 자세와 열정, 신념과 철학에 달려 있다. 아무리 찬사를 요란하게 늘어놓는다 해도 이 글이 ‘계산된 졸문’으로 평가받는다면 이는 기자의 수치요, 박 회장과 다이소엔 독이다. 딱 한 가지 덧붙이자면 삼류 정치가 경제를 망치는 현실이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일본을 넘어 세계 정상으로 달리는 우리 기업들의 도전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