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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바뀔 때마다 조기퇴진 '한전 사장 잔혹사'[현장에서]

김형욱 기자I 2023.05.22 05:00:00

정승일 사장, 정치 압력 끝에 조기 퇴진
정부 바뀌면 교체…편법 관행 또 이어져
정부에 손발 묶인 한전 앞날은 풍전등화
누가 맡아도…경영 공백 장기화 가능성
'정치 희생양'은 그만…제도개선 나서야

[이데일리 김형욱 기자] 정승일 한국전력공사 사장이 여당의 사퇴 압력 끝에 물러났다. 여당은 사상 최악의 적자, 조직 내 비위행위 등을 갖다붙였지만, 전 정부에서 임명한 인사라는 배경이 결국 그를 끌어내린 이유다. 법이 보장한 임기(3년)가 1년 이상 남아 있지만, 본인의 거취가 한전 생존에 절실한 전기요금 인상의 거래조건이 되자 더는 버티지 못했다.

정권 교체 후 이뤄지는 한전 사장의 조기 퇴진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 노무현정부 마지막해인 2007년 취임했던 이원걸 사장은 이명박정부 첫해인 2008년 퇴임했다. 안정적 경영으로 연임에 성공했던 조환익 사장도 박근혜 정부에서 문재인 정부로 정권이 바뀌자 임기를 3개월 남기고 사퇴해야 했다. 당시 일련의 과정은 산업부의 산하 공공기관장 사퇴 종용, 즉 인사권 직권남용 혐의를 받아 현재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정승일 한국전력공사 사장이 지난 12일 오전 나주 본사에서 추가 자구계획을 발표하는 모습. 그는 이날 자구계획 발표 직후 사의를 표명했고, 19일 공식 퇴임했다. (사진=한전)
정권교체 때만 벌어진 일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공공기관 혁신을 이유로 선임한 현대건설 사장 출신 김중겸 사장(2011~2012년)은 전기요금을 둘러싼 정부와의 갈등 속에 취임 1년여 만에 조기 사퇴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김종갑 사장(2018~2021년)은 임기 내내 정부와 불편한 동거를 이어갔다. 그는 ‘콩값(발전연료비)보다 두부값(전기요금)이 싸졌다’며 정부의 전기요금 동결 정책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선장을 잃은 한전은 이정복 부사장이 사장 직무대행을 수행하는 비상경영 체제를 꾸렸지만, 앞길이 막막하다. 글로벌 에너지 위기와 정부의 요금 조정 통제 아래 2년여간 쌓인 40조원 이상의 영업적자를 해소해야 하고, 5년에 걸쳐 25조7000억원의 비용을 절감하는 역대 최대규모의 자구계획을 추진해야 한다. 이 가운데 수도권 내 대규모 산업단지 신설 계획에 맞춘 대규모 전력 공급 계획도 이행해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전 직원들은 물론, 정·관계에서도 정 사장의 조기 퇴진에 대해 아쉬워 하는 소리가 터져나온다. 정 사장은 30년가량 산업통상자원부에 몸담으며 2005년 경주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건립과 2013년 밀양 송전탑 건설 등 사회적 갈등이 큰 굵직한 에너지 부문 현안을 처리했던 인물이다. 산업부 차관 시절엔 정치권과의 협의 끝에 전력산업계 숙원이던 전기요금 연료비 연동제 도입을 성사시켰다.

‘독배’가 된 한전 사장의 경영 공백이 길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조환익 전 사장의 조기 사퇴는 4개월의 경영 공백으로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를 1년여 남긴 2021년 말엔 복수 후보자를 내지 못해 한전 창립 이래 처음으로 재공모 절차를 밟았다.

한전 재무위기의 본질은 2021년부터 시작된 글로벌 에너지 위기, 그리고 전기요금 동결 의사결정의 실질적 권한을 쥐고 있었던 정부와 정치권에 있다. 정권 교체 때마다 ‘희생양’을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를 이젠 끊어내야 한다. 국내 최대 공기업의 CEO가 전기요금 인상의 인질이 돼 쫓겨나듯이 떠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하지 않겠나.

한국전력공사 전남 나주 본사 전경. (사진=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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