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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은 시민의 일상을 바꾸어놓았다. 이동권 제약이 가장 컸다. 70분간 이어진 훈련 동안 차량은 물론이고 보행으로도 이동이 통제됐다. 퇴근 인파가 몰리면 가뜩이나 심한 서울 교통난이 악화할까 우려됐다. 정부는 통행금지 시간을 새벽 1시까지 늘려 인파를 분산하려고 했다. 이를 예상하고 기업과 관공서는 야근을 줄이거나 없앴고, 직장인은 서둘러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자 이럴 바에 아예 하루 쉬자는 식당도 다수였다. 주택에서는 암막 커튼을 치고 커튼이 없으면 불을 꺼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민방위 대원이 집안으로 쳐들어올지 몰랐다. 이런 이유에서 커튼 집이 때아닌 호황을 맞았다.
대체 불을 왜 끄라는 것인가 싶다. 등화관제는 적의 야간공습에 대비하는 훈련 일환이다. 적기(敵機)가 타격점을 찾지 못하도록 빛을 지우는 것이다. 대상은 건축물(주택·건물 등), 옥외등(가로등·광고판 등), 이동수단(차량·선박·항공기 등)을 총망라한다. 방법은 등화를 가리거나(차광), 여의치 않으면 꺼버리는(소등·소광) 것이다. 민방위기본법 시행령 48조(등화관제)가 근거다. 매달 15일 민방위 날이나 정부가 정한 날에 하는 민방위 훈련에서 지자체장은 등화관제를 명령할 수 있다.
사문화돼 있던 등화관제가 부상한 시기는 1976년이었다.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이 발생한 그해였다. 북한군이 공동경비구역에서 미군 2명을 살해하면서 남북관계가 경색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야간 등화관제 훈련을 하는 사실이 알려졌다. 유사시를 대비하는 움직임이었다. 군사정권은 민간의 피해를 예방하고자 민방위 훈련을 강화하기로 했다. 주간에만 하던 민방위 훈령이 야간까지 확대되면서 등화관제가 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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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이 훈련을 위한 훈련으로 변색하기도 했다. 100% 소등 목표를 달성하고자 일부러 정전을 일으키는 아파트 단지가 나타났다. 민방위 사태에서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상황을 주시해야 하는데, 정전이 발생하면서 라디오를 켜지 못하는 웃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불 꺼진 집에서 촛불을 켜느라 화재 위험이 커져, 되레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는다는 지적도 있었다. 완장 찬 민방위 대원의 고압적 태도도 시민 불만을 키웠다. 등화관제가 반가운 이는 군사정권과 커튼 집뿐이라는 비아냥도 돌았다.
전국 단위의 등화관제 훈련은 1990년 11월15일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서울에서 첫 훈련을 한 지 13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