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강종구기자] 이성태 신임 총재가 3일 취임사에서, 그리고 기자간담회에서 하지 않은 말이 있다. 통화정책 목표로서의 `성장`을 거론하지 않았고,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입에 담지 않았다.
성장목표를 거론하지 않는 대신 그는 보다 포괄적이면서 보다 선명한 목표를 제시했다. 그는 기자감담회에서 "21세기 첫 10년동안의 한국은행 역할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고, 그 생각은 취임사에서 "`지속가능한 안정성장의 기반 조성`으로 표현됐다. 이는 두가지 안정을 의미했다. 바로 한국은행법에 명시된 유일목표인 물가안정과 지난해이후 급부상한 금융안정이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경제의 `장기흐름`을 `정확히` 예상해, `일관성있게` 통화정책을 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중언부언을 할 필요가 없었다.
박승총재는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크게 강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신임총재는 그 독립성을 유산으로 다시 한번 한은의 재탄생을 꿈꾸고 있다. 껍데기 뿐인 구호로서의 `안정`이 아니라 명실공히 `안정을 통해 번영을 추구하는` 한은을 말이다.
◇ 박승이 화려했다면, 이성태는 담백했다
박승 전임총재가 말이 많다고 언론의 입방아에 수없이 오르내렸지만, 이성태 신임 총재가 그것을 교훈(?) 삼아 말을 아끼려 들지는 않을 것 같다. 그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언론을 시장과 대화하는 통로로 적극 활용할 뜻을 분명히 했다.
"한가지 말씀드리자면, 예전에는 중앙은행이 시장에 대해서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고,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때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시각이 많았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지난 80년대부터 전세계적으로 금융자유화가 크게 진전되면서 중앙은행과 시장과의 관계도 상당히 달라졌다. 그래서 앞으로 언론을 통한 시장과의 대화에 대해 유념해서 한은을 이끌어나가는 것이 좋을 거라고 본다" (2006년 4월 3일 이성태 총재 기자간담회)
그러나 화법은 달라질 것 같다. 두 선후배는 취임사를 하는 것부터 달랐다.
박승 전임 총재의 화법은 화려하기로 유명했다. 절묘한 비유와 풍부한 경험에 혼을 섞어 놓은 듯한 강렬한 어조로 청중의 귀를 사로 잡았다. 4년전 4월 1일 취임한 박 총재는 취임사에서도 그랬다. 박 총재는 마음의 고향인 한국은행에 총재로서 복귀한 것에 감격했고, 한국은행에 대한 깊은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의 오늘, 그러니까 1961년 4월 1일, 저는 이 자리에서 당시 전예용 총재님으로부터 한국은행 행원 임명장을 받고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저는 입행과 함께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시던 노모님을 모셔올 수 있었고 경제 전문가로서의 수련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중략) 한국은행의 구석구석에는 저의 손때 묻은 옛정이 서려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제 친형제 자매와 같은 애정을 가지고 대할 것입니다"(2002년 4월 1일 박승총재 취임사)
이성태 신임 총재는 전임자처럼 솔직했지만, 화려하기보다는 담백했다. 그는 `선비(?)답게` 비유없이 곧바로 화두를 던졌고, 직설적이지만 자극적이지 않았다. 그의 취임사에는 미사여구가 없었다. 대신 막중한 책임감과 비장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오늘 저는 우리나라 경제정책의 중요한 한 축을 맡고 있는 한국은행 총재로 임명받아 이자리에 섰습니다. (중략)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며 감회를 금할 수 없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선진경제로의 도약을 앞당겨야 하는 소임의 막중함 또한 절감하고 있습니다"(2006년 4월 3일 이성태 총재 취임사)
대학교수를 오래 지낸 박 전임총재는 가르치고 설득하는데 강했다. 상대가 자신을 `이해할 때까지` 그의 노력은 계속되곤 했다. 그의 4년전 취임사도 마치 통화정책의 전문가들인 한국은행 직원이 아닌 일반 국민들을 상대로 하는 듯 친절했다.
" 저는 중앙은행의 역할과 위상은 경제발전단계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빈곤의 해결이 급선무인 개발 초기단계에서는 부족재원 조달을 통화증발과 외자에 의존하고 자원배분에 있어서도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성장우선정책이 불가피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안정을 지키려는 중앙은행의 기능과 위상은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지난날이 그러했습니다"(2002년 4월 1일 박승총재 취임사)
이성태 신임 총재는 굳이 설득을 하거나 이해를 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성장보다는 안정`을 추구한다고 말할 때도 그래야만 하는 장황한 배경설명은 없었고, "경기를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식의 단서를 달지 않았다. 대신에 `노이즈(noise)없는 보다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주력하려는 인상을 풍겼다. 그의 말은 `당위`에 가까웠다.
"이제부터는 경기상승세를 다져가면서 지속가능한 안정성장의 기반을 조성하는데 정책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중략) 이같은 구조개혁 노력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긴 안목에서 꾸준히 지속되는 것이 필요하며 이는 경제의 안정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의 책무를 맡고 있는 중앙은행의 역할이 그 어느때보다 중요하다 하겠습니다"(2006년 4월 3일 이성태 총재 취임사)
◇ 선배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지만...
박 전임총재는 지난달말 퇴임사에서 "경제를 일으키려고 나름대로 혼신의 노력을 한 것에 대해 잊을 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고 감회를 전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일면 불행했다고도 할 수 있다. 단적으로 "금리를 올리겠다"고 취임 일성을 날렸던 그에게는 `경기 부양론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 동안은 재정뿐 아니라 한국은행의 통화정책도 안정보다는 경기진작에 우선순위를 두어 왔습니다. 그러나 .. (중략) 이제는 차츰 더 많은 노력을 안정 쪽에 기울여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중략) 중앙은행이 물가안정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2002년 4월 1일 박승총재 취임사)
박 총재는 `경기진작에서 안정으로`의 통화정책 방향 전환에 대부분의 재임기간에서 실패했다. 박 전임총재가 취임한 이듬해인 2003년 카드사태가 터지고 내수는 침체에 길고 긴 침체의 늪에 빠졌다. 그는 결국 2004년 11월 사상 최저수준인 3.25%까지 콜금리를 인하해 경기부양에 앞장 선 총재로 기록됐다.
이와 관련해 박총재는 퇴임사에서 "민생은 어려운데 부동산 가격은 폭등하는 특이한 상황이 빚어졌다. 통화정책은 매우 어려운 갈등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둘중 하나를 고르라면 민생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 한은의 입장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박 총재는 퇴임 5개월을 앞두고 세번의 금리인상을 잇달아 단행하는 새 역사를 썼다. 많은 사람들이 경기회복 여부를 의심하고 있었고 물가는 지나칠 정도로 안정된 상황에서 저금리가 만들어낸 폐해인 자원배분 왜곡, 그리고 그로 인한 금융불안 가능성을 치유해야 한다며 그렇게 했다.
자원배분의 왜곡, 금융불안의 조짐이 가장 컸던 곳은 다름 아닌 부동산시장이었다. 세번의 금리인상은 그래서 부동산을 표적으로 삼았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이 신임 총재는 부동산 문제에 대한 대응에서 박 총재보다 한뼘은 더 적극적이다. 퇴임사에서 "부동산문제만으로 통화정책을 하는 중앙은행은 어느 나라에도 없으며, 또 그래서도 안된다"고 말했던 박승 총재와 다음의 이 신임 총재의 말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부동산 문제는 전세계적인 현상일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전세계적인 통화정책 기조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통화정책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안정화정책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물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물가가 통화정책의 전부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통화정책이 잘되고 잘못되고에 따라 그걸 나타내는 징조는 꼭 물가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물가 외 다른 분야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부동산시장도 그중의 하나라고 본다. 부동산이 통화정책의 주 목적은 물론 아니고, 지금까지 한은이 수년간 얘기해왔듯 부동산만 보고 통화정책을 할 수는 없지만 부동산이 통화정책 관련 중요한 부분인 것은 틀림없다. 다만 부동산 문제는 한은이 부동산가격을 본격적으로 분석해서 구체적인 정책을 만드는 기관은 아니다.그렇기 때문에 한은이 관심을 갖는다면 어디까지나 통화정책 측면에서 갖는 것이다. 전체 금융시장 안정이라는 측면이다" (2006년 4월 3일 이성태 총재 기자간담회)
◇ 경제 구조조정의 시대, 통화정책의 덕목은?
이 신임 총재가 진단한 한국 경제의 현실은 선진국으로의 도약이냐 아니면 퇴보냐의 기로에 서있는 난국이다.
경제는 성장해도 저조한 투자, 급속한 고령화와 저출산, 그로부터 파생되는 성장잠재력 저하, 산업부문간 양극화, 고용없는 성장, 후발 개도국의 추격에 쫓기는 제조업, 선진국에 비해 크게 떨어져 있는 신기술과 서비스산업의 경쟁력....
"이러한 어려움은 우리 경제가 성숙단계로 이행하면서 나타나는 구조적 요인에 개방화, 지식정보화, 저임금 경제권의 부상 등 세계 경제환경의 급속한 변화가 더해진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규제와 보호를 근간으로 하는 경제운용이나 기업경영방식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경제의 미래는 글로벌 수준의 효율과 경쟁력을 어떻게 하면 조기에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2006년 4월 3일 이성태 총재 취임사)
어디서 많이 듣던 말들이다. 바로 박승총재의 단골 메뉴였다. 경제발전 과정에서의 한국경제의 현주소, 그리고 새로운 환경의 도전에서 박 총재와 이 신임 총재의 인식은 연결돼 있다.
두 총재의 처방도 똑같이 `구조개혁`이다. 이 신임 총재는 "시장기능을 한층 강화하여 민간의 창의적 혁신 노력을 이끌어 내는 것"을 구조개혁의 지름길로 제시했다. 정부가 아니라 시장이고, 혁신이다.
이성태 총재가 추구하는 앞으로의 통화정책은 구조개혁이 가능한 경제상태가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물가와 금융을 안정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단기적 성장률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앞으로의 통화정책이 성장과 물가, 익숙한 이 두가지 목표에만 몰두하기 어려운 배경에는 `개방화`로 대표되는 환경의 변화가 자리잡고 있다. 달라진 환경은 "경제가 성장하면 물가가 상승한다"는 명제마저 흔든다. 때로는 성장과 물가를 모두 달성하고도 통화정책은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저가격제품은 경기가 살아나고 있는 우리경제의 물가상승률을 2%대로 떨어뜨렸다. 이는 반대로 중국이 인플레이션을 수출하는 날에는 우리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면서도 물가가 치솟는 문제에 봉착할 수 있음도 의미한다. 이런 날이 현실이 된다면 한은은 과연 금리를 올릴 수 있을까.
산업간, 기업과 가계간 양극화는 성장과 고용의 상충을 만들 수 있다. 경제는 5%대 성장을 하는데 IT부문 수출 대기업의 주주와 직원을 뺀 나머지는 모두 민생고에 허덕인다면 금리를 올리기란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때 한국은행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신임총재가 제시한 것은 정확한 경제의 장기예측을 바탕으로 한 정책의 일관성이다. 그리고 실기하지 않는 과감함이다.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여 시장의 예측가능성을 높여 나가야 합니다. 통화정책을 일관성 있게 운용하려면 경제의 중장기 흐름을 앞서 내다보는 안목을 지녀야 합니다. (중략) 불확실성으로 인해 중앙은행은 정책결정에 신중할 수 밖에 없으나 그렇다고 실기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불확실성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2006년 4월 3일 이성태 총재 취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