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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가 사라진 신문, 화염에 휩싸인 청춘…아르코 소장품에 담긴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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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 기자I 2026.10.18 05: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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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 18년 만에 소장품전 개최
작가 60명 작품 70점 전시
1970년부터 2000년대까지 시대 변화 조명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언론의 자유가 억압받던 1970년대의 시대상이 글자가 사라진 신문에 고스란히 담겼다. 서울 종로구 아르코미술관 1층 전시실 벽면에는 곳곳이 도려내진 신문들이 걸려 있다. 그 아래 ‘정기휴간’이라는 글귀가 놓인 유리 상자에는 잘게 잘린 신문 조각들이 수북하다. 성능경의 ‘신문: 1974년 6월 1일 이후’(1974)는 기사를 오려내는 행위를 통해 당시 언론 검열과 정보 통제의 현실을 오늘의 관객에 전한다.

성능경의 ‘신문: 1974년 6월 1일 이후’(사진=이윤정 기자).
성능경의 ‘신문: 1974년 6월 1일 이후’(사진=이윤정 기자).
예술작품을 통해 한국 사회의 변화와 현대미술의 흐름을 되짚어보는 전시가 열린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가 운영하는 아르코미술관은 오는 12월 6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특별기획전 ‘소장품, 시대의 장면들’을 선보인다. 1974년 개관 이후 수집한 소장품 423점 가운데 작가 60명의 작품 70점을 공개한다. 아르코미술관이 소장품전을 여는 것은 2008년 이후 18년 만이다.

차승주 책임 큐레이터는 “이번 전시는 아르코미술관 소장품의 의미와 예술적 성취를 재조명하는 데 의의가 있다”며 “작품에 담긴 시대상뿐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와 기억이 교차하며 형성해 온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한 장면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아르코미술관 특별기획전 ‘소장품, 시대의 장면들’(사진=아르코).
아르코미술관 특별기획전 ‘소장품, 시대의 장면들’(사진=아르코).
소장품에 담긴 한국 현대미술 40년

1974년 미술회관으로 출발한 아르코미술관은 청년 작가와 미술단체에 전시 공간을 제공하며 실험적인 예술 활동을 지원해 왔다. 개관 이후 1980년대까지 수집한 작품이 275점으로 전체의 약 65%를 차지한다. 특히 소장품의 약 25%는 대한민국미술대전 수상작을 기증받은 것으로, 당시 정부의 예술 지원 정책과 미술관의 작품 수집이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자체 기획전과 연계한 작품 구입이 늘어나면서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발굴하고 기록하는 역할로 확대됐다.

이번 전시는 작품 제작 시기를 기준으로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10년 단위로 구성했다. 1970년대에는 단색화와 실험미술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지를 활용한 추상미술의 선구자 권영우의 ‘작품 78-76’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한지를 뜯고 구겨 붙이는 방식으로 완성한 작품으로, 화면 가득 불규칙하게 솟아오른 하얀 한지 조각들이 마치 작은 조각품처럼 입체감을 드러낸다. 붓과 먹 대신 한지 자체를 표현의 재료로 삼아 서예와 회화의 경계를 허문 작가의 실험정신이 엿보인다.

홍종명의 ‘새와 같이’와 ‘새야 새야’는 황토빛 화면에 새와 인물의 형상을 거친 붓질과 투박한 선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표현에 한국적인 정서와 토속적인 색채가 배어 있다. 차 큐레이터는 “당시 단색화가 미술계의 주류였지만, 사실적인 그림과 추상화의 경계에서 한국적 정서를 표현하려는 작가들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1980년대에는 암울한 사회 현실을 담아내면서도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현실을 풍자하는 등 한층 다양해진 미술의 흐름을 만날 수 있다. 민정기의 ‘풍요의 거리’는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TV 보급과 함께 쏟아져 나온 대중문화의 이미지들을 화려한 원색으로 화면 가득 채웠다. 자동차와 미인, 슈퍼맨 등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들이 뒤섞인 모습은 당시 대중매체가 만들어낸 풍요의 환상을 풍자적으로 드러낸다.

유영렬의 ‘적멸’은 푸른빛 화면에 촘촘히 찍힌 수많은 자국이 눈길을 끈다. 물감을 묻힌 엄지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찍어낸 흔적들이 물결처럼 일렁이며,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상태를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최민화 ‘분홍-양아치’(왼쪽)와 송상희 ‘푸른 희망’(사진=이윤정 기자).
최민화 ‘분홍-양아치’(왼쪽)와 송상희 ‘푸른 희망’(사진=이윤정 기자).
1990년대에는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개인의 개성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등장했다. 최민화의 ‘분홍-양아치’는 분홍빛 화면에 나란히 앉아 웃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을 담았다. 청년들을 감싸고 있는 붉은 배경은 당시 격렬했던 시위 현장의 화염을 떠올리게 한다. 붉은 화염과 인물에 덧입혀진 흰색의 대비를 통해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청년들의 애환을 드러낸다.

2000년대에는 회화에서 설치·영상으로 확장된 미술의 표현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작가가 직접 붓을 들고 몸을 움직이며 선을 그려나가는 이건용의 ‘신체드로잉 76-1-2019’ 제작 과정도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송상희의 ‘푸른 희망’은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쪽 팔이 보이지 않는 여성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밝은 미소와 신체의 결핍을 대비시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희망을 드러낸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박생광의 ‘이조’, 김구림의 ‘음양 99-S, 207’ 등 미발표작 10여 점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소장품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활용 가능성을 모색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한국화와 판화, 추상미술, 민중미술, 조각과 공예 등 분야별 외부 연구자 6명이 참여한 연구 성과를 별도의 아카이브 공간에서 공개한다. 정서연 연구자는 “과거에는 의미 있는 활동을 했지만 지금은 맥이 끊긴 작가들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뜻깊은 연구였다”고 말했다.

아르코미술관 특별기획전 ‘소장품, 시대의 장면들’(사진=아르코).
아르코미술관 특별기획전 ‘소장품, 시대의 장면들’(사진=아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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